[우리역사 통설에 대한 문제 제기] '한국사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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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에서 시작되는 고조선상은 허구다" "실학은 조선왕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보수적 개혁사상이었다" "동학 농민봉기는 결코 반봉건적.근대적 운동이 아니었다" …. 근거없는 '깜짝 쇼' 의 주장만은 아니다. 한마디로 한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도발로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저자는 지난 몇년간 역사 대중화 작업을 전개해 온 젊은 사학자 이희근씨다.

『한국사는 없다』는 자극적 제목처럼 신간은 고조선에서부터 조선 후기 실학과 동학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통설에 반기를 든다. 저자가 그간 펴낸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한국사 그 끝나지 않는 의문』 등과 비교할 때 신간 『한국사는 없다』는 앞선 책들의 중간 결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기존 역사서에서 우리 역사의 출발점은 고조선이다. 엄밀히 말해 단군조선이며 그 시조는 단군이다. 흔히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 를 저술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고조선상은 허구" 라며 포문을 연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한국사의 출발점이 단군조선이 아닌 기자조선이었고 민족의 시조 또한 단군이 아닌 중국에서 온 '기자' 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른바 '소중화의식' 인데 저자는 일연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일연은 왜 삼국사기에서 단군을 내세웠을까.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식민지와 다름없었기 때문에 고려가 나름의 독자적 역사를 가진 나라임을 보여주려 한 일연의 의도는 일단 인정된다. 그러나 중국 고대의 이상적 제왕인 요순(堯舜) 의 관계처럼 단군이 기자에게 선양(禪讓) 했다는 대목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일연이 인용한 사료의 '기자동래설' 이 중국의 중화주의자에 의해 조작됐고, 또 단군 자체가 한반도 전체가 아닌 평양 일대 고조선계 일부 유민들의 시조일 뿐" 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존 통념을 뒤집는 이런 주장 이후에 저자는, 아니 우리 역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신간 『한국사는 없다』는 우리 역사서에서 반성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소중화의식' 을 질타한다. 조선시대의 경우 단군조선을 기점으로 기자조선으로 이어지는 상고사 체계를 세웠지만 단군을 기자보다 소중하게 추앙한 것은 아니었다. 성리학이 극성할 땐 오히려 기자에 대한 숭배가 극단화하기도 했다.

기자에 대한 숭배는 일제시대에 이르러 바뀌며 기자조선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민족주의 강조의 시대적 필요성 때문인 것으로 기자는 아예 무시되고 단군이 민족의 시조이자 상징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또한 고려시대 이후 소중화주의자들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역사의 재해석 과정에서 보다 엄밀한 검토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한국의 근대성과 관련하여 조선의 실학과 동학에 대한 연구는 가장 인기있는 품목이다. 실학과 동학이 주자학 중심의 조선왕조를 극복하고 근대화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것이 기존의 학설이다.

그러나 저자는 실학과 동학이 체제내 보수개혁운동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실학자의 경우 주자학을 오히려 극찬했으며, 토지제도를 비롯한 사회개혁을 강조한 것은 조선왕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실학이란 용어도 고려 말부터 쓰였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최근 소장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는 주제를 사료적 근거를 대며 확인하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다.

이밖에 이 책엔 '신라는 삼국 통일할 뜻도 능력도 없었다' '과거 역사엔 지역차별이 결코 없었다' 등 민감한 쟁점을 포함한다.

한가지 아쉬움은 비판에만 너무 치중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제 역사의 '없음' 을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 합리적 역사 인식의 '있음' 으로 나아가는 더욱 정교한 후속작업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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