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남은 인생은 필리핀 원주민에게 바칠 겁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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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지난 1월 필리핀 오리엔탈 민도르섬을 방문해 원주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는 박운서씨.

"앞으론 나를 '타이거 박'이 아니라 '언더우드 박'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라. 허허허…."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경제비서관, 김영삼 정부 때 통상산업부 차관을 지낸 박운서(66)씨는 요즘 새로운 인생을 준비 중이다. 필리핀 원주민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화려했던 그의 공직 생활과 1996년 이후 한국중공업 사장.LG상사 부회장.데이콤 회장을 거치면서 노조를 잘 다루는 최고경영자(CEO)로 이름을 날리던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생뚱맞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이제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남은 인생은 남을 위해 살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타이거 박'이라는 별명은 83년 대일 무역협상 과정에서 재떨이를 깨뜨릴 정도로 격론을 벌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일본 언론이 붙여준 것이다. '언더우드'는 우리나라 개화기에 선교와 교육사업을 펼쳤던 미국인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

"2003년 말 현직에서 물러나고 나니 허전함, 허무함같은 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아내(김옥자씨)가 담임목사로 있는 예수선교교회의 해외선교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최근 필리핀을 방문했다가 오리엔탈 민도르섬 오지에 사는 원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위생시설 등이 얼마나 엉망이었던지 40세를 넘긴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이곳 원주민들을 돌보는 일에 자신을 던지기로 하고 10년 계획을 세웠다. 우선 열대 과일만 먹고 사는 이들이 농작물을 재배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줄 계획이다. 이를 위해 4월 중순께 3만 평 정도의 토지를 사서 한국의 두레마을처럼 공동농장 방식으로 운영키로 했다. 학교와 예배당도 짓기로 했다."

-돈이 제법 들텐데.

"40년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아놓은 돈이 있다. 필리핀은 땅값이나 인건비가 싸니까 그리 큰 돈이 들지 않을 것이다."

-높은 데서 지내던 사람이 오지에서 험한 일을 할 수 있겠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다. 그리고 나도 20여년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해오면서 이런저런 험한 일들을 많이 해봤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박씨는 요즘 필리핀 봉사활동 준비 외에도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데이콤 대표이사 시절의 구조조정 이야기를 담은 책을 집필하는 것이다. 현재 마무리 단계인 이 책(가칭 '돌밭을 갈아엎는 이야기')에는 정부의 통신 정책과 통신 업계에 대한 충고도 담겨 있다.

그는 상공부 국장과 청와대 비서관 시절에 일을 가장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미친 듯이 일했으며 내 브랜드를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후배 공무원들에게 따끔한 한마디를 아끼지 않았다.

"과거에는 사명감에 불타 윗사람하고 부딪치기도 했는데…. 요즘은 10년 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대신 코드 맞춰가며 높은 자리에 오를 생각만 하는 것 같아."

글=서경호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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