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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원 전화와 '어, 엄마야' 했더니 친딸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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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무자식 상팔자’팀은 내게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김해숙. “극중 모든 사람들은 제 각각 사연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품어내는 엄마를 연기하려 한다”고 말했다. ‘국민엄마’에 어울리는 넉넉한 마음씨다. [김진경 기자]

이제는 너무 남발돼 퇴색한 느낌마저 들지만 그에게 이 수사를 안 쓸 수 없다. ‘국민엄마’ 김해숙(57). ‘무방비도시’ ‘박쥐’ ‘도둑들’ 등 영화에서도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오랫동안 TV 속에서 보여준 푸근한 엄마 연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가 JTBC 주말드라마 ‘무자식 상팔자’(김수현 극본)에서 또 하나의 ‘엄마’를 선보이고 있다. 심약한 남편(유동근)마저 다독거리는 간호사 출신의 통 큰 엄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듯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 3대 대가족의 중심에 서 있는 캐릭터다. 미혼모로 나타난 판사 딸(엄지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눈물연기가 화제가 됐다.

 김씨는 ‘부모님 전상서’ ‘천일의 약속’ ‘인생은 아름다워’에 잇따라 출연하며 김수현 작가의 무한신뢰를 받고 있다. 실제 만난 그는 TV 속 이미지 그대로였다. 겸손했고, 편안하고 따뜻했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같았다.

‘무자식 상팔자’의 김해숙(왼쪽)·유동근 부부. [사진 JTBC]

 - 역시 김수현 작가 때문에 출연하게 됐나.

 “워낙 작품다운 작품을 쓰시니 불러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배우보다 배우에 대해, 연기에 대해 잘 아는 작가다. 지문이나 대사의 밀도가 높아서 그대로만 하면 캐릭터가 완성된다. 물론 배우가 표현할 게 대본보다 못하니까 한계를 느낄 때도 많다. 하지만 그래서 자극이 된다. 내 모자람을 알게 하고, 불꽃을 태우듯 에너지를 주며, 나를 살아있게 하는 대본이랄까. 김수현 선생님은 세상을 정말 넓게 보시는 분. 작가로도 존경하지만 인생의 멘토다.”

 - 대사량이 많은데, 어찌 다 외우나.

 “‘인생은 아름다워’때는 5페이지 분량도 있었다. 희한하게도 선생님 대본은 잘 외워진다. 사람 마음을 잘 알고 그 마음대로 쓴 대본이라 그런 거 같다. 어떤 대사는 수첩에 써놓기도 한다. 이번에도 ‘눈 딱 감고 눈 뜨지 말았으면 좋겠어’라는 대사가 있다. ‘나 죽고 싶어’보다 얼마나 시적인가.”

 - 가족드라마에서 연기를 하는데 포인트가 있다면.

 “배우들이 진짜로 한 가족을 이뤄야 한다. 우리 드라마는 일단 가족들이 현실적이다. 악한 사람도 없고 비현실적인 얘기도 없고,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가족이다. 특히 배우들의 호흡이 중요하다. 서로 엄마 아빠 딸 삼촌, 이렇게 부르는 건 기본이다. 연기 자체도 가족처럼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한다. 자기만 튀지 않고, 나는 없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연기다. 이런 호흡을 끌어낼 때는 감독의 역할이 아주 중요한데, 정을영 감독님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주신다. 뒤에 숨어서 배우들의 호흡을 기막히게 짚어주신다.”

 - 호랑이 감독 아닌가.

 “보통 때는 카리스마 있지만 현장에서는 얼마나 유머러스한지 모른다. 연세가 있으신데도 B팀(보조팀) 없이 혼자 다 찍으신다. 새벽 3~4시에 끝나도 또 대본을 보시고, 그 열정에 감탄한다. 김 작가님과 명파트너인 이유가 다 있다.”

 - 김수현 작가는 쪽대본이 없다. 촬영일정이 여유 있겠다.

 “이번 주말이 7, 8회 방송인데 11, 12회 다 찍고 13, 14회도 세트촬영만 남았다. 근데 배우 입장에서는 핑계거리가 없으니까 부담도 된다. 대본이 늦어서 문제라는 얘기를 못하는 거다. 처음엔 좋은데, 나중엔 대본이 쓱쓱 나오면 무섭다니까(웃음). NG도 거의 안 난다. 어떨 땐 후배들한테 NG 좀 내라, 나 준비 더하게, 농담처럼 이런다.” (웃음)

 - 이순재·서우림·송승환 등 쟁쟁한 선배들이 많으니 어린 연기자들이 주눅들지 않나.

 “아이들이 존경하는 선배가 돼야지 무서워하는 선배가 돼서는 곤란하다. 이순재 선배님 같은 분이 모범을 보이시니 내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다. 우리는 가족이고 자식은 우리 책임이니까, 어린 연기자들이 연기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가르쳐준다.”

 - 딸 역의 엄지원과 인연이 각별하다던데.

 “10년 전 지원이의 데뷔작 ‘황금마차’(MBC)에서 엄마와 딸이었다. 내가 엄마를 많이 해서 자식 역을 한 배우들이 많은데, 남편 역할은 쉽게 잊혀져도 자식 역은 잘 안 잊혀진다. 드라마 속에서 엄마랑 자식은 연인보다 더 애틋하다. 드라마 끝나도 계속 연락하고, 잘되면 그렇게 기쁠 수 없다. 지원이는 평소에도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 나도 ‘어, 엄마야’라면서 전화 받으니까 우리 친딸이 ‘여기 딸이 멀쩡히 있는데 무슨 딸이 그렇게 많아’라며 질투한다.” (웃음)

 - 남편 유동근이 평소 이미지와 달리 약한 캐릭터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김영철 선배도 그랬는데, 센 남자들이 우리 드라마에 와서는 유하고 색다른 모습을 보인다. 유동근씨도 근엄한 왕 역할만 했는데, 여기선 곰돌이처럼 귀엽지 않나. 너무 잘 울어서 나도 깜짝 놀란다.”

 - ‘국민엄마’라는 타이틀의 의미는 뭔가.

 “영광스러운 일이다. 물론 배우로서 보여주고 싶은 다른 모습도 많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역할이 엄마라면, 앞으로도 더 사랑받는 국민엄마가 되고 싶다. 바람이 있다면 아직 표현되지 않은, 새로운 유형의 엄마를 하고 싶다. 영화에서는 엄마 이외의 다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서 진짜 행복했고.”

 -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전성기가 온 경우다.

 “빨리(24살)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러면서 활동을 쉬기도 하고 그래선지 어릴 땐 배우라는 인식이 별로 없었다. 나이 들어가면서 오히려 연기의 맛을 알았고 열정도 커졌다. 그런데 지난해 큰 위기가 왔다. 홀어머니 외동딸로 자랐는데 어머니께서 많이 아프셨다. 연기를 떠나 인생 자체에 회의가 왔다.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런데 그걸 극복하는 것도 결국 일(연기)이었다. 일을 해도 힘들지만, 안 할 때 더 힘든 거 같다. 촬영현장에서 살아있는 느낌이야말로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란 걸 절감했다.”

 - 연기관이 있다면.

 “나이로 인해 대접받는 배우는 절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연기엔 선후배도 없고, 완성도, 끝도 없다. 내가 봐도 소름 끼치게 잘하는 후배들이 있다. 후배들에게도 배워야 한다. 스스로 잘한다고 자만할 때가, 배우는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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