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미주 이민 100주년]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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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학원 보내기 바람은 다른 인종에까지 파급됐다. 뉴욕의 C학원은 학원생 8백여명의 절반이 중국인이다. 원래 한인 대상 학원이었지만 지난 10년 간 브롱스 과학고 등 뉴욕의 영재고등학교 네곳에 매년 1백여명씩 입학시킨 것이 알려지면서 중국계들이 대거 몰린 것이다.

이 학원의 孫모 원장은 "입학 안내서를 한국어.중국어 두 언어로 만들고 있고, 중국계 직원 두명을 두고 진학 상담도 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이 학원 입구에 붙어 있는 입학 안내문은 한자와 한글 두개 언어로 쓰여 있다.

LA의 H영재스쿨 韓모 원장은 "히스패닉 부모들이 오후 3시부터 세시간 가량 일주일에 두번 정도 진행하는 영어 토론반에 대해 계속 문의를 해와 올해부터는 히스패닉 학생반도 만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액 과외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한인 부모들은 돈을 아끼지 않는다. 뉴저지의 부촌 알파인에 사는 朴모씨는 고2 아들과 초등학교 6학년 딸에게 미국 현지인들이 가르치는 영어.수학 새벽 과외를 시키고 있다.

예체능 과외비까지 합치면 웬만한 월급쟁이 봉급보다 많은 3천5백달러(4백20만원)가 매달 과외비로 들어간다. 하지만 朴씨 부부는 "이웃 유대인 가정에서도 개인 과외를 시키고 있다"며 "우리만 특별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이같은 교육열이 미국인들의 눈에는 신기하다 못해 비정상적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미국 공영방송인 PBS의 기자 지니 오는 "공부는 학교에서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에게는 방과 후 다시 '제2의 학교'인 학원에 보내고 별도의 개인교습까지 시키면서 엄청난 돈을 투자한다는 자체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난해 고등학교를 건너 뛰고 대학교에 바로 입학한 한인 영재 학생과 그 부모에 대해 특집보도를 한 후 "부모의 극성으로 자녀가 고등학교에서 거쳤어야 할 삶의 경험을 뺏은 꼴이 됐다"는 미국인들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백인들이 뭐라 하든 한인들은 "교육열이야말로 한인들이 미국사회에 정착하는 원동력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유의영 한.미연합회 인구센서스센터 소장은 "아무 기반도 없는 한인들이 짧은 기간 안에 미국 사회에 재빨리 정착하게 된 것은 다른 인종과 달리 자녀 교육에 헌신적으로 투자했기 때문"이라며 "교육열은 2세들이 미국사회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줬다"고 지적했다.

버클리대학과 UCLA를 졸업하고 지난해 캘리포니아주에서 첫 한인 여성 판사로 임명된 태미 정 류도 "마음껏 공부해라. 여자라고 시집갈 생각만 하지 말아라"고 북돋웠던 부모님의 격려와 뒷바라지가 지금 자신을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자신있게 밝혔다.

인구센서스센터가 미국 정부의 2000년 인구조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 바깥에서 태어난 한인 이민 1세들의 연평균 소득은 3만1천달러였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2세들은 5만1천달러로 수직상승했다.

학력도 한인 1세들은 48.8%가 대졸 이상이었지만, 2세에서는 54.7%로 뛰어 올랐다. 한인들의 경우 1세보다 2세에서 교육 수준과 소득 수준이 함께 올라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이는 히스패닉이나 백인.흑인들에게서는 1세와 2세 간의 교육.학력 수준이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과 대비된다.

LA 시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며 정계 입문을 준비하고 있는 김승욱(35)씨. 그의 아버지 김병용(73)씨는 이민 전인 1956년 등록금이 없어 2년제 춘천농과대학 부속 중등교원양성소를 한 학기 만에 포기했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 이주한 뒤 LA 시청 앞에서 매일 열두시간씩 일하며 '존스 버거'라는 햄버거 가게를 꾸리는 동안 아들 승욱씨는 UCLA 경영학 석사를 마쳤다.

승욱씨가 졸업 후인 93년 리처드 리얼든 LA시장의 보좌관으로 특채돼 시장실에서 일할 때 아버지는 여전히 시청앞 햄버거 가게를 지켰다. 승욱씨는 "지금의 나는 1백% 아버지의 희생 덕분"이라고 말한다.

물론 교육열이 반드시 성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도에 좌절하는 자녀들도 있다.

2000년 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민간 제임스(가명.18)가 처음 부닥친 장벽은 언어였다. 텍사스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수업은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백인 학생들이 점심 시간 감자 튀김을 던지며 텃세를 부리자 오기로 한인 학생과 어깨동무를 해보였더니 '게이'라며 놀려댔다. 결국 한달반 만에 한인 학생들이 많은 LA의 고등학교로 옮겼다.

LA에서도 한인 친구들과 놀러다니는 것이 더 편했다. 제임스는 지난해 초 25일을 장기 결석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낯선 땅 미국에서 도대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고민"이라며 우울해 했다.

LA에서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한인 자녀들을 위한 대안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김기웅 목사는 "10대 자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경쟁에서 이겼다는 결과보다 경쟁을 헤쳐나갈 준비를 갖추겠다는 태도"라며 "한인 부모들이 성과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자녀들의 좌절감만 더할 수 있다"고 말했다.

LA의 벤 나이스 고등학교의 김순진 상담교사는 "이제 한인들의 교육열은 2세들의 개인적 성공만 요구하는 방식으로 돼서는 안되며 2세들이 미국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해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감 또한 키워주는 형태로 이뤄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특별취재팀=신중돈.변선구.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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