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대의 기타로 연주하는 스카를라티 소나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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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 봄, 파리넬리라는 예명으로 유명했던 이탈리아 출신 카스트라토 카를로 브로스키는 그가 20년 동안 3명의 군주에게 봉사했던 스페인 왕실을 떠나기 위해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였던 파리넬리는 음악을 이용해 왕과 귀족들의히스테리를 치료하는 신기한 재능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가 20년 전 고향인 이탈리아를 떠나 스페인 왕실로 초빙돼 왔던 것도 실은 펠리페 5세의 우울증을 음악으로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던 펠리페 5세는 밤만 되면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망상에 시달렸으며 드넓은 왕궁 안을 비명을 지르며 배회하는 증세로 왕실 전체를 불안과 근심에 시달리게 했으나, 신기하게도 파리넬리가 부르는 노래만 들으면증세가 가라앉곤 했다.

때문에 파리넬리는 펠리페 5세가 사망하기까지 무려 8년 동안 매일 밤 5곡의 똑같은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펠리페 5세가 죽은 뒤에도 그는 스페인 왕실로 시집온 포르투갈의 황녀 마리아바르바라를 위해 10년간 궁정음악가로 봉직했다.

그러나 바르바라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시기한 궁정 귀족들의 음모에 휘말린 파리넬리는 1758년 더 이상 그의 노래가 필요없게 됐으니 즉시 스페인 땅을 떠나라는추방명령을 받았다.

별 수 없이 파리넬리는 고향인 이탈리아로 가기 위해 배에 오르게 됐는데 이 때파리넬리가 탄 배에 실린 그의 짐꾸러미에는 가죽으로 장정한 악보 15권이 포함돼있었다.

이 악보들은 파리넬리를 총애했던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으면서 그에게 유산으로증여했던 것들이었다.

신원 미상의 인물에 의해 손으로 쓰여진 그 악보는 마리아 바르바라가 처녀 시절 포르투갈 왕실에 있을 당시 그의 음악 교사였던 이탈리아의 대작곡가 도메니코스카를라티(1685-1757)의 작품들이었다.

30년 동안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실에서 마리아 바르바라와 다른 왕족들의 하프시코드 교사로 봉직했던 스카를라티는 생전에 약 550곡의 작품을 남겼는데 대부분이건반악기를 위한 곡들이다.

파리넬리가 마리아 바르바라에게서 유증받은 15권의 악보 역시 그중 일부로 만약 파리넬리와 그를 도왔던 이탈리아 출판업자들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잊혀질 뻔했던 작품들이다.

최근 미국 도리안사(社)에서 출시한 「스카를라티 15」는 하마터면 영원히 멸실될 뻔했던 바로 이 15권에 수록된 작품중 일부를 연주, 녹음한 음반이다.

원래 건반악기를 위해 작곡된 이 소나타들을 미국 등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의 기타리스트 줄리언 그레이와 로널드 펄이 기타 두오곡으로 편곡해 연주했다.

초기작인 「소나타 가단조 K 7-프레스토」에서부터 비교적 후기작에 속하는 「소나타 마장조 K 531-알레그로」까지 모두 14곡의 소나타가 수록됐다.

그레이와 펄의 편곡은 특히 화성적 효과를 풍부하게 살린 점이 인상적이다. 이같은 편곡의 효과는 기타 특유의 따뜻하고 세밀한 음색과 결합되면서 다소 청명하고건조하게 들릴 수 있는 원곡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꿔 놓는다.

마치 한적한 4월의 시골길을 마차로 달리고 있는 듯한 경쾌함이 인상적인 「소나타 라장조 K 435-알레그로」라든가 칙칙한 포석이 깔린 18세기 마드리드의 거리를신사복 차림의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풍경을 묘사한 듯한 「소나타 마장조 K 531-알레그로」에서는 기타 두오만이 갖는 실내악적인 오밀조밀한 색채가 잘 나타난다.

그런가하면 파스토랄풍의 「소나타 가단조 K 109-아다지오」나 파사칼리아풍의「소나타 가단조 K 466-안단테 모데라토」에서는 병든 왕녀가 어두운 방안에서 부슬비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듯한 분위기의 고적함이 묻어난다.

어쩌면 원곡대로 하프시코드나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이 훨씬 더 예술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기타 두오 편곡 또한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이 음반은보여 준다.
(서울=연합뉴스) 정 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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