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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인터뷰] 이종욱 결핵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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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 보건의료의 메카다. 천연두 박멸에서 에이즈 예방까지 국가가 해결하지 못하는 인류 전체의 보건문제를 다룬다.

1만여명의 연구인력이 근무하며 해마다 10억달러의 예산을 집행해 규모 면에서 유네스코, 국제노동기구와 더불어 유엔산하 3대 기구로 인정받고 있다. 헬리코박터 세균이 발암물질이 된 것도, 비만이 질환으로 분류된 것도 세계보건기구의 유권해석에서 비롯됐다.

이 기구를 지휘하는 사무총장 자리에 한국인 의사가 도전한다. 현재 세계보건기구 결핵국장으로 있는 이종욱(李鍾郁.57) 박사다.

"인터뷰는 무슨, 아직 당선된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일 한 것도 없는데."

2003년 1월 1일 오후 5시 제네바 공항에 내린 이박사는 손을 내젓기 바빴다. 오는 28일 32개국 집행이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릴 사무총장 선거운동을 위해 그레나다 등 3개국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길이다.

현재 8개 국가에서 후보가 나왔다. 강력한 라이벌은 모잠비크의 모쿰비 총리다.

현재 주요 국제기구 대표는 아프리카 사람 일색이다. 가나 출신의 코피 아난이 유엔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것을 비롯해 식량농업기구(FAO), 지적재산권보호기구(WIPO), 세계기상기구(WMO),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아프리카에서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엔 그의 당선 가능성이 높은 분위기다. 후보 대부분이 정치인이어서 보건전문가 출신인 그의 경력이 단연 돋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사무총장을 지낸 브룬트란드도 노르웨이의 총리였다.

이 때문에 일본 마이니치 신문과 영국의 의학잡지 랜시트는 최근 조심스레 그가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당선된다면 한국인 최초의 국제기구 수장이 탄생하게 되는 셈이다.

'백신 황제(vaccine czar)'. 1995년 미국의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이 당시 백신국장이었던 그에게 붙인 칭호다. 세계인구 1만명 당 1명 이하로 소아마비 유병률을 떨어뜨려 박멸에 가까운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2000년 결핵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북한에 6만명 분의 결핵약을 공급하는 등 19개 국가를 대상으로 결핵퇴치사업을 벌이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도 밀실행정 및 관료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정치적 헤게모니에 의해 정책이 입안되는 경우도 있었지요. 이젠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는 공약으로 기금 확대를 내걸었다. 에이즈 하나만을 위해서도 매년 10억달러의 비용이 소요될 정도로 전 세계 보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투명한 효율 경영을 통해 모금운동을 확산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실제 그는 97년 유명 테니스선수 마르티나 힝기스로부터 백신연구기금 7만5천달러 기부를 끌어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분권화도 개혁 방안이다. 그는 예산의 75%를 제네바 본부보다 현장에서 질병과 싸우는 세계 6개 지역사무소에 배당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당선을 위해 한국정부도 외교적으로 총력 지원을 하고 있으며 국내 지인들을 중심으로 후원회가 결성되기도 했다. 그는 모국에 감사한다고 했다. 해마다 한국정부가 세계보건기구에 국가 분담금 4백만달러를 지원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인 에리테리아에선 한국의 한 건설업체가 아파트와 발전소를 잘 지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좋았다고 털어놨다.

새삼 그의 과거가 궁금했다. 그러나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 지인들에게 수소문해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76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내내 경기도 안양 나자로 마을에서 나병 환자를 위해 봉사진료를 했다. 일본인 부인 레이코 여사도 그때 만났다. 가톨릭 신자로 봉사차 한국에 온 동갑내기 레이코 여사와 79년 결혼했다.

당시 의사면 개업해서 쉽게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졸업 후 태평양 오지로 날아가 봉사의 길을 택했다. 하와이대에서 공중보건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나병 퇴치를 위해 피지.사모아 등을 오갔다. 83년 세계보건기구 남태평양 사무소 나병 팀장으로 세계보건기구에 입문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91년까지 15년간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동남아에서 의료봉사에 헌신했다. 국제사회에서 평가받는 이유일 것이다. 그는 낙선한다 하더라도 정년인 60세까지 3년은 남았으므로 결핵국장으로서 현재 벌이고 있는 결핵퇴치사업 ' Stop TB(결핵 스톱)' 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에이즈와 말라리아, 결핵은 빈곤이 유발하는 3대 질환입니다. 국제적 협조가 필요합니다. 이번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우리나라도 국력에 걸맞은 참여가 있었으면 합니다. 특히 결핵은 우리나라도 인구의 절반 가량이 한 차례 이상 결핵균 감염 경험이 있어 면역력이 떨어지면 다시 창궐할 수 있습니다."

매년 전 세계에서 8백만명이 새로 결핵에 걸리고 2백만명이 결핵으로 죽는다고 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책정한 2년간 1억달러의 결핵 퇴치 예산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다. 그의 판단 여하에 따라 개도국 국민 수천, 수만명의 생명이 좌우될 수 있다는 뜻이다.

'바보 같은' 의사였던 그가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 되어 세계인의 건강을 위해 제시할 청사진이 기대된다.그는 제네바의 작은 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아들 충호(25)씨는 미국 코넬대 전기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특별한 취미도 없다고 한다. 해외출장이 잦아 집에 머무르는 기간이 짧지만 틈이 나면 부인과 함께 도시락을 싸 레만호 등 인근 호숫가를 찾는다고 했다.

제네바(스위스)=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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