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누구에게나 삶은 가볍지 않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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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양선희
논설위원

사제 치릴로. 2주 전 세상을 떠난 마흔 살의 젊은 가톨릭 사제입니다. 그는 선종 당일 오전, 부산에 일정이 있다며 지팡이를 짚고 경기도 양주시의 사제관을 나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몹시 아파 보였기에 동료 신부들이 강제로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그는 그 몇 주 전부터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걸어 다녔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승용차가 없었던 그는 언제나처럼 미사에 필요한 제의와 책 등을 담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짚고 출퇴근하며, 그를 부르는 곳마다 가서 미사를 드리고 강의를 했습니다.

 그는 병원에 들어간 지 12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미 폐암 말기에다 온몸엔 암세포와 염증이 퍼져 있었습니다. 이를 가족도 동료들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태연하게 평소와 똑같은 일상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그가 안부를 챙겼던 말들 속에 이미 그는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다는 흔적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늦둥이 막내였던 사제 치릴로는 원래 약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폐결핵에 걸려 3년 내내 독한 약으로 버텼습니다. 그래도 입원했을 때를 빼곤 학교에 빠지지 않았고, 사제의 길을 꿈꾸며 일요일마다 예비신학생 모임에 꼬박꼬박 나갔습니다. 일찍이 엄마가 돌아가시고 누나의 부실한 병 수발에도 아프다고 징징거리거나 게으름을 피울 줄 몰랐습니다. 평생을 여러 지병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참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사제 치릴로는 자신의 위태로운 육체를 아꼈고, 어떤 상황에서든 희망적인 면을 발견할 줄 알았습니다. 징병 신체검사에서 1급을 받았을 때, 가족들은 황당했지만 자신은 홀로 흐뭇해하면서 입대 후엔 군대를 사랑하게 되어 군종신부를 꿈꾸었습니다.

 그는 골동품 같은 구형 폴더폰과 T-머니 교통카드를 들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낡은 등산화를 신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녔습니다. 수년째 매주 양주 집에서 한때 요양했던 경기도 용인시 장평리 수녀원까지 100㎞도 넘는 길을 전철과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가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지팡이를 짚고도 그 일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말수가 적고 감정 표현이 무뎠던 그의 빈소에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문상객을 보고서야 그가 얼마나 부지런히 살았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의정부교구 상장례학교장이었던 사제 양종인 치릴로는 생전에도 가슴 한편을 무지근하게 눌렀던 막내 동생입니다. 겁도 많고, 세상사에 미숙해 보여 걱정했던 그가 어떻게 이렇게 큰 병 앞에서 그토록 무심하고 태연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픔을 호소하거나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다만 그 무서운 병마저도 일상처럼 순응하면서, 생명의 마지막 한 방울마저 소진된 순간까지 자신의 일상을 꼭 붙들고 우직하게 살다 갔습니다. 마치 ‘일상생활의 수호’가 자신의 임무인 양 말입니다.

 동생의 상을 치르고 마주 선 일상엔 ‘삶에 대한 가벼움’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수능을 앞두고 또 수험생이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고, 연탄불을 피워놓고 자살하려던 남자가 낸 불로 아파트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TV를 틀면 수많은 연예인들이 “한때 자살을 생각했었다”는 말을 토크쇼 하듯 쉽게 하는 모습을 빈번하게 보아야 했습니다. 왜 이렇게 죽음이 가벼운 것인지…. 이런 모습들에 오히려 비현실적인 세상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문관인 수전 오코너 박사는 한국의 정신건강시스템 전반을 다룬 평가 보고서에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 알코올 남용과 도박, 인터넷 중독, 학교폭력 등 ‘정신적 고통이 만연한 나라’라고 진단했습니다. 자살을 한 손에 대안으로 쥐고, 병원에서 치료한다고 그 고통이 나을까요? 누구나 삶의 고통을 말끔하게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겁니다. 그저 이즈음에 죽음에 이르는 병과도 다투지 않고 고통마저도 자기 삶으로 끌어안고 마지막 순간까지 일상을 놓지 않았던 치릴로 신부와 같은 삶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