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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상, 대충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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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기선민
중앙SUNDAY 기자

1996년 열린 제34회 대종상 영화제는 사상 최악의 시상식으로 불린다. 작품상을 탄 ‘애니깽’ 때문이다. 최고상을 탈 만한 수준이냐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문을 제기했음은 물론 출품 직전에야 제작이 끝나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가 상을 받은 점도 문제가 됐다. 누가 봐도 상식에 어긋난 상황이었다. 몇 달 후 ‘애니깽’ 제작사가 일부 심사위원에게 금품을 줘 매수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종상은 공개망신을 당했다. 대종상 집행위원회는 이듬해 출품작 자격을 ‘전국 8대 도시에서 7일 이상 개봉된 극영화’로 제한하는 등 개선책을 내놨다. 하지만 한번 추락한 권위는 회복되지 않았다.

 한때 대한민국 최고 영화상이었던 대종상은 ‘애니깽’ 이후 공정성 시비와 운영 미숙 등으로 줄곧 하향곡선을 그렸다. 현재 영화계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영화인회의 등 후배 영화인들로부터 찬밥 취급을 받은 지도 오래다. 이런 가운데 30일 밤 치러진 제49회 대종상 영화제는 이 상의 초라한 현주소를 재확인한 자리였다. 공정성 시비가 다시 불거졌다. 최근 1100만 관객을 돌파한 ‘광해’가 15개 부문 상을 휩쓸었다. 영화인들이 앉아 있던 시상식장 객석은 침묵으로 얼어붙었고,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달아올랐다. “‘벤허’나 ‘아바타’도 못 이룬 15관왕이 탄생했다”“대종상은 대충상(대충 주는 상)이냐”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한 영화가 15개 상을 독식하는 건 드문 일이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1000만 관객이 본 ‘광해’의 작품성에 특별한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진 않는다. 핵심은 납득할 만한 과정을 거쳤느냐다. 그렇지 못하면 상을 안 주느니만 못한 결과가 될 수 있다. 대종상은 방법적 측면에서 올해 큰 문제를 드러냈다. 일반인 예심과 전문가 본심에서 토론을 배제한 ‘블라인드 심사’가 오히려 주최 측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몰아주기’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게만 하면 공정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거라 여긴 아마추어적인 사고의 결과다. 영화상은 인기투표가 아니다. 해외의 권위 있는 영화제들이 명망 있는 전문가를 심사위원으로 정해 토론을 시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전문적 식견으로 여러 요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과정에서 상의 권위와 신뢰가 확보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상당수 영화인이 대종상을 자신들의 축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납득이 간다. 올해 집행위는 원로 제작자 곽정환 전 서울시극장협회장, 배우 고은아 부부에게 영화발전공로상을 줬다. 공교롭게도 곽 전 회장은 ‘애니깽’ 제작자로 금품 로비에 연루돼 물의를 일으킨 전력이 있다. 권위 추락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이에게 공로상을 주는 기묘한 상황을 후배 영화인들이나 관객들이 납득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올 초 거듭나겠다며 사단법인을 만든 대종상은 문화부와 서울시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는다. 지금의 모습으론 대충 주는 상이요, 세금 낭비라는 비판 외엔 들을 말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