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열풍’ 한국, 성찰의 시대로 들어섰단 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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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의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 170㎝, 68㎏ 작은 체구다. 그는 “걷는 데 필요한 건 근육이 아니라 의지”라고 했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길고 험한 길을 혼자서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까지 다 걸은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베르나르 올리비에, 그가 걸은 길의 이름은 실크로드다. 그가 실크로드 도보 횡단을 시작한 나이는 예순한 살이었으며, 그가 4년에 걸쳐 걸은 길의 길이는 1만2000㎞이다.

 세계 최초의 실크로드 도보 여행자 베르나르 올리비에(74)가 한국에 왔다. 올리비에는 29∼31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2012 월드 트레일 콘퍼런스’에 강연자로 초청돼 지난 27일 입국했다.

30일 오후에 만난 올리비에의 첫 인상은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철각(鐵脚)과는 거리가 있었다. 예의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키가 얼마냐?”고 대뜸 물은 까닭이다.

 “170㎝에 68㎏입니다. 생각보다 작지요? 프랑스에서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걷는 데 필요한 건 근육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내가 덩치가 큰 사람이 아니란 사실이 내 말을 뒷받침하지요. 나는 특별한 영웅이 아닙니다.”

 가까이서 본 올리비에의 몸집은 다부졌다. 오랜세월 걷기로 다져진 몸이었다. 말투도 분명하고 강단 같은 게 느껴졌다.

 “한국은 세 번째 방문입니다. 2004년 실크로드 여행기를 담은 『나는 걷는다』가 한국에 출간됐을 때 처음 왔고, 둘째 아들이 한국 방송국에서 일한 적 있어 함께 한국을 여행한 적도 있습니다. 28일엔 서명숙 이사장과 제주올레를 걸었는데, 바다와 어울린 경치나 해안 절벽이 조각품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많은 한국인이 제주올레를 걷는 걸 보고 한국에도 걷기가 인기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월드 트레일 콘퍼런스’는 (사)제주올레가 주관하고 지식경제부 등이 주최하는 세계 유일의 국제 트레일 단체들의 모임이다. 2010년 이후 3년째다. 올 행사에는 제주올레를 비롯해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 미국의 ‘애팔래치안 트레일’ 등 전 세계 17개국 23개 트레일 관계자가 참가했다.

 “예순 살에 은퇴하고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무기력한 마음에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산티아고 가는 길’을 혼자 걸었고, 1999년부터 2002년까지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西安)까지 혼자 걸었습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책을 펴냈고, 그 책의 수익으로 탈선 청소년 교정단체 ‘쇠이유’(Seuil, 경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올리비에는 퇴직 언론인이다. 30년 동안 ‘르 피가로’ ‘파리 마치’ 등 프랑스 언론에서 정치·경제·사회부 기자로 일을 했다. 그런데 왜 하필 실크로드였을까.

 “실크로드는 세계화의 발상지입니다. 수천 년 전부터 수많은 문물이 이 길을 통해 서로 전해졌지요. 그런데 이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은 사람은 거의 없더군요. 상인에게는 자신의 구역과 코스가 있었습니다. 나는 혼자서 실크로드를 다 걸은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마르코 폴로도 혼자는 아니었으니까요.”

 실크로드에서 그는 숱한 위험을 겪었다. 내전 중이던 터키를 통과할 때는 정부군과 혁명군 양쪽에 끌려 다녔고, 언어가 안 통하는 낯선 땅에서 수도 없이 길을 잃었다. 도둑과 짐승의 위험과 맞섰고, 병에 걸려 쓰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고마운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며 “실크로드에서 친구 1만5000명을 사귀었다”고 추억했다.

 올리비에는 현재 쇠이유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모든 수익을 쇠이유에 붓는다. 쇠이유는 소년원에 수감 중인 청소년이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다른 나라에서 3개월 동안 2000㎞를 걸으면 석방하는 교정 프로그램이다.

그는 “일반 소년범의 재범률은 85%이지만 쇠이유를 거친 소년범의 재범률은 15%”라며 “걷기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치유 활동이란 증거”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한국의 걷기 열풍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물었다.

 “한국에서 걷기가 인기를 끄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아직 걷기가 레저활동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건 걷기가 두 발을 움직이는 물리적 행동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정신적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한국 사회가 성찰이 필요한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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