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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벤처 토양 메말라” … 국내 최초 ‘비틀맵’도 푸대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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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김은영 지오마케팅 대표가 서울 강남 지역을 손으로 그린 ‘비틀맵’ 앞에 서 있다. 김 대표는 “한국은 비틀맵 같은 서비스 창업 기업이 클 수 있는 여건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사진 지오마케팅]

1997년 11월 수입 맥주회사의 마케팅 담당 임원이었던 김은영(47) 지오마케팅 대표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지도가 아니라 영국이나 캐나다에서 봤던 예쁜 그림 지도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직원 한 명과 함께 컴퓨터 작업을 하지 않고, 선도 자를 대지 않은 채 삐뚤삐뚤 그려 ‘아날로그의 따뜻함’을 살린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수채화 형식 3차원 입체 그림 지도 ‘비틀맵’이다.

 비틀맵은 외국인에게 더 유명하다. 동대문 등 외국인이 많이 찾는 곳엔 어김없이 김 대표의 비틀맵이 안내판 형태로 길을 알려준다. 지방자치단체 지도 점유율도 1위다. 노란색 비틀맵은 일본 관광객 사이에서 ‘노란 책’으로 불리며 관광 필수품으로 평가받는다. 15년 만에 2명이던 직원은 40명으로 늘었다. 첫해 1억원이었던 매출은 현재 한 해 33억원 수준. 압도적인 점유율과 브랜드 가치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김 대표는 “내가 무능력한 건가 그간 고민도 많이 했다. 그러나 서비스 벤처가 자랄 토양이 메마른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정부 자금 2000만원을 지원받으려다 서류가 너무 복잡하고, 담보까지 내라고 해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담보 잡히고 2000만원 지원 받느니 그 시간에 영업 뛰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김 대표는 “가장 큰 문제는 정부와 지자체의 최저가 입찰 제도”라고 말했다. 2000만원 이상짜리 계약은 무조건 최저가 입찰제를 통해 계약해야 한다. ‘국내 최초’라는 압도적인 품질 차이에도 불구하고 입찰 가격을 낮게 써낸 업체를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는 “15년 전 지자체와 처음 계약을 맺을 당시보다 계약 가격이 더 싸졌다”고 토로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제조업은 10억원 생산당 9.3명을 채용하는 데 비해 서비스업은 17.4명을 채용한다. 그만큼 서비스업의 고용효과가 크다. 하지만 국내 서비스산업은 낙후돼 있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60.8%를 정점으로 떨어져 지난해 58.1%까지 떨어졌다. 김진수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서비스업이 커야 일자리가 늘어난다. 특히 창업 시장에서 서비스산업 기업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정부의 지원은 미미하다.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법인세·소득세 등을 감면하는 제도도 제조업은 전 업종이 혜택을 받지만 서비스업은 법에 열거된 몇몇 업종만 감면을 받을 뿐이다. 공공계약 때도 제조업은 KS인증을 받으면 가점을 주지만 서비스업은 품질에 대한 평가 없이 최저가 낙찰만 강요받는다. 정부는 이를 고치기 위해 서비스업에도 KS인증 같은 제도를 도입해 정부 계약 때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으나 아직 널리 시행되지 않고 있다. 정부의 창업 지원도 제조나 정보기술(IT) 업체에 집중되고 있다. 반면에 미국에선 IT가 디자인·금융·의료 서비스와 결합하며 새로운 서비스 벤처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의료서비스 벤처인 굿닥을 지난 5월 시작한 임진석(30) 대표도 서비스 벤처에 대한 열악한 인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경우다. 그는 가족의 병으로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느라 고생한 경험 때문에 의사와 환자를 연결하는 의료 서비스 회사를 차렸다. 그는 지난해 12월 티켓몬스터 신현성 대표의 창투 회사 패스트트랙아시아의 최고경영자(CEO) 육성대회에서 1등을 했다. 5개월 만에 3명이던 직원은 27명으로 늘었다. 임 대표는 “의료 벤처는 신약 개발이나 기기 제조업체가 대부분”이라며 “의료 서비스 벤처라고 하니 지원받기가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국내 최초 소비자와 의사를 연결한 서비스로 3000여 곳의 병원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했지만, 정부에서 지원받은 돈은 콘텐츠진흥원에서 중국어 번역사업으로 3000만원을 받은 게 전부”라고도 했다. 그는 “패스트트랙아시아의 창업 지원금 2억5000만원이 없었으면 회사를 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특별취재팀=최지영·장정훈·김호정·채승기·조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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