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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DJ를 부정하는 DJ 부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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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박정희가 피살된 지 33년이 지났다. 며칠 전 추도식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이렇게 호소했다. “이제는 아버지를 놓아드렸으면 한다.” 지금 박정희에 대한 선동적 공격은 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가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15년 전에 이미 박정희를 놓아준 최대 정적이 있었다. 이해찬·박지원의 사부(師父), 김대중(DJ)이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사회는 박정희를 재평가했다. 검소한 생활과 애국적 헌신이 알려지면서 국민은 독재자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박정희 신드롬(syndrome)’이 생겨난 것이다. 93년 MBC는 26부작 드라마 ‘제3 공화국’을 방영했다. 드라마는 61년 5·16부터 72년 10월유신까지를 다루었다. 논란도 있었지만 결국 박정희는 역사의 개척자로 등장했다. 박정희를 연기한 이진수는 많은 주목을 받았다.

 세계도 박정희 재평가에 착수했다. 93년 3월 세계은행은 ‘동아시아의 교훈’이란 세미나를 열었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개발 성공 비결을 연구한 것이다. 한국에선 9년3개월간 박정희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이 참석했다. 이듬해 10월 세계은행 경제개발원(EDI)은 김정렴의 박정희 경제정책 회고록을 정책수립 회고 총서로 채택했다. 선진국은 물론 개발도상국의 많은 관리·학자·학생이 이 책을 읽었다. 책은 이미 일본과 중국에서도 출판되고 있었다.

 YS 정권의 실정과 부패,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박정희 향수는 더욱 짙어졌다. 97년 대선 무렵 박정희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이인제 경기지사는 한때 지지율 1위였는데 그는 박정희를 닮은 외모로 덕을 보았다. 이인제는 선거 포스터 사진을 박정희와 비슷하게 만들었다. ‘제3 공화국’ 분장사에게서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를 가장 세게 껴안은 이는 DJ였다. DJ는 경북 구미 박정희 생가를 방문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약속했다. 집권 후 그는 약속을 지켰다. 기념관 건립에 예산을 지원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99년 5월 대구 방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가 6·25 폐허 속에서 허덕일 때 박 대통령은 ‘우리도 하면 된다’는 국민적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국가에 공헌했고 근대화를 이룩했다.”

 박정희에 대한 DJ의 포용은 한국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97년 12월 대선을 40여 일 앞두고 DJ는 JP(김종필)와 합쳤다. 당시 JP의 자민련은 유신 잔당이 아니라 본당(本黨)이었다. JP는 5·16 쿠데타 세력의 2인자이며 유신 정권의 국무총리를 지냈다. 자민련 2인자 박태준은 5·16 직후 박정희 비서실장이었다.

DJ가 JP와 연합하자 DJ 핵심 부하들은 공동집권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 이해찬은 핵심 부서인 후보지원단의 수석부단장을 맡았다. 박지원은 총재특보였다.

 15년이 지난 지금, 이해찬과 박지원은 박정희를 역사의 죄인으로 난도질하고 있다. 지난 7월 이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아 있으면 내란음모 수괴로 처벌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민주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박정희가 처벌되면 JP도 처벌될 것이다. 그러면 DJP 연합도, 김대중 대통령도 없다.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후보도 역사에 없을 것이다. 박 원내대표는 최근 국정감사에서 “박 대통령이 5조원의 재산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악의적인 허위 사실을 만들어 박정희를 부정 축재자로 매도한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때론 기억을 지워버리는 지우개가 되곤 한다. ‘표’라는 현재 앞에서 역사라는 어제를 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지우개도 가려서 지워야 할 것이다. DJ는 민주당의 시조(始祖)이자 뿌리다. 그런 DJ의 행적을 지우면 민주당의 정통성은 어찌 될 것인가. 한명숙은 지난 4·11 총선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 해군기지를 지우려 했다. 그의 지우개는 별로 팔리지 않았다. 이해찬·박지원의 지우개는 얼마나 팔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