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경기침체 전세계 불황으로 파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해부터 미국의 제조업과 첨단기술부문에서 시작된 경기침체가 이제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10년만에 처음으로 세계 경기의 동시 침체현상을 초래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18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일본이 10년 간 장기침체를 지속하면서 수출주도형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제품을 수출할 시장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다, 남미지역에는 또 다른 외환위기가 닥치고,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건재를 자신하던 유럽마저 불황의 `감염 초기''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로지 중국만이 전세계 동시 불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전세계의 주요 기업체 임원들과 경제정책입안자들은 경기침체가 부메랑 효과를발휘, 침체가 처음 시작된 곳을 강타하면서 미국의 신속한 경기회복의 기회를 날려버리고 전세계 경제를 후퇴국면으로 몰고가게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최근에 나온 각종 경기지표들을 살펴보면 화살표의 대부분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싱가포르 경제가 경기후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이미 공식화됐으며 프랑스는 소비지출이 갑자기 얼어붙었다고 지난주에 발표했다.

유럽 최대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독일에서도 제조업 부문의 수주실적이 약화됐으며 그에 따라 주요 경제단체들은 올해 성장률이 고작 1%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17일 제조업활동 동향을 보여주는 산업생산지수가 지난 6월 중 0.7% 하락, 9개월 연속 감소세를 이어갔다고 발표했다.

지난 주말 로마에서 주요 선진국 재무장관들의 회동에서는 미국이 감세와 금리인하, 에너지 가격하락 등으로 원기를 회복하면서 세계 경제침체 탈출을 견인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측을 제시한 바 있다.

실제로 지난 1998년 아시아의 경제위기가 발발했을 때 당시 미국이 경기활황을보이면서 상품소비의 마지막 보루역할을 충실히 해냄으로써 위기를 타개했다. 현재미국에서 소비와 주택시장 부문에서는 여전히 높은 신장세를 이어가고 있어 내년초반까지 3%의 성장률을 유지한다면 세계 경기를 또 한번 불황에서 건져낼 수 있을 것이라고 몇몇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국제경제연구소(IIE)의 C. 프레드 버거스텐소장은 "미국이 세계경제를 침체에서 끌어낼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비관론자들의 주장도 만만찮다. 이윤감소와 전반적인 생산과잉으로 인해미국 기업들이 자본지출을 급격히 줄이고 있기 때문에 FRB의 금리인하 조치가 약효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게다가 실업률의 상승과 가계소득의감소로 결국에는 소비지출도 감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비관론자들은 말했다.

취리히증권의 데이비드 헤일 수석경제연구원은 "현재의 국면을 전환시킬만한 성장의 견인차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경기불황이 전염병처럼 전세계로 빠르게 확산되는 원인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세계교역 규모 ▲금융.투자의 세계화 ▲다국적기업의 성장 등 3가지요소를 꼽고 있다.

세계교역은 전세계 경제의 생산에서 25%의 비중을 점하고 있으며 이는 1970년에비해 2배에 이른다. 지난해 기준으로 멕시코 경제에서 미국시장으로의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5%이며, 캐나다의 경우 대미수출 의존비율이 32%에 달한다. 특히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이 비율은 40%로 치솟는다. 미국 경기침체로 인해이들 국가가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셈이다.

금융.투자의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지난 1980년대 일본의 거품경제가 미국 경기를 자극하고 1990년대에는 미국 나스닥의 활황이 유럽과 아시아 시장의 동반 호황을 촉발했으나 이제는 남미의 외환위기가 세계경기의 발목을 잡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의 크리스티안 노이어 부총재는 "우리가 과소평가하고 있는것 가운데 하나는 급성장한 다국적 기업의 영향력"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들 다국적기업은 본사의 소재지와 상관없이 미국 경기침체에 기민하게 반응, 투자를 재빨리동결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의 경제성장률이 당초 전망치 보다 훨씬 급격히 떨어지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핀란드의 노키아는 지난해 휴대폰 판매실적이 66%나 급증하면서 올해 야심찬 투자계획을 수립했으며, 미국경제의 침체와 유럽 이동전화서비스업체들의 차세대 휴대전화시스템 도입의 연기 발표 등에도 불구하고 올해 35%의 판매신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노키아는 세계경제 불황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종업원 3천명이상의 감원계획을 발표했으며 60달러를 웃돌던 주가는 17달러선으로 주저앉았다.

이러한 충격은 단지 노키아 자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노키아에 반도체칩을 공급하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역시 지난 4월 2천500명 감원 계획과 함께 10억 달러 규모의 투자 감축계획을 발표했다. 독일의 반도체메이커인 인피니온의 경우 올해 2.4분기 5억달러의 손실을 예상하고 있으며 이 파장은 디스플레이공급업체인 필립스에 이어 배터리메이커인 일본의 산요, 파워증폭모듈 공급사인 히타치까지 미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경을 넘어 대기업들간에 상호의존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불황은 전염병처럼 무섭게 번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경제정책입안자들에게 불황을 차단하려는 노력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예일대학 경영대학원의 제프리 E. 가튼 학장은 "현시점에서 세계경제 회복을 위한 공식은 미국 경제부양을 위해 단순히 세금감면과 금리인하 조치를 취하는 것에비해 훨씬 더 복잡할 수 밖에 없다"면서 "정치지도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자기만족적인 행동은 상황을 더욱 위험스럽게 한다"고 지적했다. (워싱턴=연합뉴스) 김성수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