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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진의 세삼탐사] 아킬레스건이 된 ‘정치개혁 공약’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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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호 35면

내년 2월 출범할 차기 정부의 주요 과제 중 우선순위는 정치개혁이다. 정치적 양극화에 따른 갈등의 정치, 대결의 정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대한민국의 명운이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나 복지 확대도 중요하지만 정치는 그걸 주워 담을 그릇이다. 그릇이 깨지고 더럽혀져선 아무리 훌륭한 공약이라도 제대로 실현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타난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세 후보들의 정치개혁 공약은 내용이 부실하거나 미덥지 못하다. 각 진영의 허접한 상대 헐뜯기 공방에 이르면 이들이 진정 나라를 위하는 집단인가 의심까지 들게 된다. 밭갈이하겠다며 밭에다 자갈더미를 쏟아 붓는 격의 ‘정치 개악’이다.

박근혜 후보의 경우 출마 일성으로 ‘대통합’을 내세웠다. 그러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 참배를 시작으로 화해와 통합의 행보를 시작했다. 시대적 화두에 맞는 공약이자 실천이란 점에서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전태일재단 방문에서 제동이 걸리고 유신·인혁당 논란을 거치며 더 이상 실적이 없다. 통합과 화해가 자기 마음먹은 대로 찾아가면 이뤄지는 식의 손쉬운 일이면 어찌 시대적 과제가 됐겠는가. 꽉 닫혀 있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야 하는 까다롭고도 지난한 작업이다. 한 번 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두드리고 정성을 다해 손을 내밀어야 한다. 대통합에 대한 절박함이 없는 탓인지 성의가 부족해 보이고 성과도 미미한 상태다.

‘대통합’은 정치개혁의 상위개념일 수 있다. 대통합이 이뤄지면 우리의 고질적 대결정치를 한순간에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후보가 대통합을 공약의 첫 번째로 내세운 건 평가할 만하다. 12·19 대선까지 남은 시간에 보여줄 성의와 실적만큼 보통사람의 표심도 반응하리라고 본다.

문재인 후보는 정치개혁 공약으로 ‘책임분산형 총리제’를 제시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겠다는 점에서 수긍할 만하지만 대결정치 해소를 위한 해법이라 할 수 없고,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를 염두에 둔 역할분담론으로 비쳐 정략의 냄새마저 풍긴다. 더군다나 문 후보는 출발부터 전직 대통령 묘소를 선별 참배하는 등 ‘배격’의 행보를 보였다. 역주행이다.

지금 호남정서는 혼란스럽다. 민주당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면서도 노무현 정부 시절에 소외당했다는 섭섭함이 새록새록 기억나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부에서 특정인 축출론이 불거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편가름 정치를 주도했던 친노 인사들에 대한 일각의 반감도 팽배하다. 문 후보로선 그걸 불식하는 일이 급선무다. 탕평의 대화합 정치가 해결책인데도 거꾸로 계층 간 각진 대결을 전략으로 취하려는 인상이라 걱정이다. 정치개혁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니 전향적 정치쇄신안이 나오길 기대한다.

안철수 후보는 대선 출마 이유가 “정치쇄신을 하기 위해서”다. 그런 만큼 두 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쇄신 공약이 구체적이고 방향도 맞다. 대결 정치를 넘는 ‘협력 정치’가 모토다. 그는 “대통령은 국회를 존중하고, 정당은 의원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교과서 같은 공허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목에 방점이 있다.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과 소통하는 모습이 전개돼야 한다. 대통령이 절대 권력자라고 생각지 말고 스스로 변화하며 제도를 존중해야 한다.”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국회의원들과 토론하는 소통의 정치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이다. 역대 대통령에게선 보지 못했던 광경이자 여론이 줄기차게 주문해온 내용 그대로다.

국회의원의 자율성 보장, 정당 공천의 국민 행사, 대통령 권력 축소와 국회의원의 특권 폐지 등 그가 내건 3대 과제도 새 정치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는 내용이다. 다만 현실정치의 입문생이다 보니 그가 과연 그토록 지난한 작업을 성취해낼 수 있을지, 그의 정치적 실력에 대한 의문이 없지 않다. 그런 의구심을 풀어주는 게 안 후보의 최대 과제인 셈이다.

세 후보 모두 생각해 보라. 대통령이 된 다음 주요 공약을 실행하기 위해 각종 입법안을 제출했을 경우를. 상대당이 극렬 반대로 나설 것은 불문가지다. 어떻게 할 텐가. 의석수가 많을 경우 숫자로 밀어붙일 건가, 반대당이 의사당을 점거하면 날치기 수법을 동원할 건가. 그래서 또 욕설과 폭력을 반복할 것인가. 의석 수가 부족할 경우엔 장외의 원군을 동원할 것인가. 그래서 광장의 촛불을 또 다시 지필 것인가. 유권자들은 지금 그에 대한 답변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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