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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보다 일자리 만들기 경쟁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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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신헌철
SK미소금융재단 이사장

지난주, 한국에서 싱가포르까지 약 4200㎞를 항해하는 액화천연가스(LNG) 선박에 승선해 28명 선원들과 7일 동안 밤낮을 함께했다. 한국에서 카타르까지 1만㎞를 15일 동안 밤낮 없이 항해하는데 싱가포르까지 동승한 것이다.

 이어도 부근과 남중국해에 깔린 중국 어선들을 피하고 태풍 때문에 대만해협으로 항로를 바꾸는가 하면, 분쟁지역인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곁을 지나 4000m의 심해라서 물 색깔마저 다른 남중국해를 통해 운항을 이어나갔다. 선장에서부터 조리사에 이르기까지 한낮의 뜨거운 갑판 위에서나 자정을 지난 캄캄한 바다를 지켜보는 브리지에서 24시간 일사불란하게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선원들과의 많은 대화 속에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라는 바다 위에서 외항 선원으로 세상을 헤쳐가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시간적·공간적으로 좁혀 볼 수 있었다.

 1962년 10월 울산 배나무 밭에서 하루 3만5000배럴의 정제 능력으로 출발한 석유 산업은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올해도 세계 최고 품질의 석유 완제품을 60% 가까이 수출함으로써 수출 5000억 달러를 넘어서는 일에 1등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원유를 들여오기 위해 한 척당 1억5000만 달러(약 1700억원) 건조비가 드는 유조선이 국내 하루 소요량인 220만 배럴 원유를 싣고 매일같이 항해를 하고 있다. 건조비 2억 달러의 LNG선도 하루 소요량과 비슷한 약 7만t의 LNG를 싣고 한국을 향하고 있다. 한국과 중동을 잇는 약 1만㎞ 항로에는 매일 한국으로 오는 유조선과 LNG선이 각각 20여 척, 그리고 하역 후 되돌아가는 유조선·LNG선이 또 각각 20여 척에 이른다. 결국 바다 위에는 매일 80여 척의 초대형 선박들이 줄을 이어 한국을 오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최신형 거대 선박의 난간에는 철조망이 어울리지 않게 둘러져 있었다. 해적들이 갑판 위로 쉽게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 치고는 너무 원시적이라고 웃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망망대해에서 우리의 재산을 보호하는 국방력이 부족할수록 이런 울타리라도 더 높여야 하는 현실을 알아야 한다. 이어도, 센카쿠 열도, 말라카 해협을 지나보면 동중국해에서의 안전도 국방력이 담보되어야 하는 이유를 쉽게 알게 된다.

 정치에 관심이 적었던 외항선원들도 12월 대선에서 건국 이래 처음으로 실시하는 외항선원 부재자 투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상 처음의 선상 부재자 투표는 ‘실드 팩스’ 방식으로 선상에서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한 후 즉시 투표지를 본인이 직접 주소지, 시·도 선관위에 팩스 전송하게 되어 있었다. 이제 투표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승무원들은 무역 1조 달러 시대의 최일선 산업 일꾼다운 경제 인식과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왕복 2만㎞에 이르는 최장 항로를 약 6개월간 연속 승선하는 힘든 특수 직업이지만 인터넷을 통해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이 2.4%로 예상된다는 뉴스를 보고 무엇보다 일자리에 대한 걱정을 하는 모습들이었다. 일자리가 줄고 평생직장 개념이 약화되면서 희망퇴직과 비정규직 고용이 늘어나면 자신들의 일자리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들의 경제민주화 구호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경제활동을 일자리와 복지에 연결시키려는 목적보다 표를 얻기 위한 선거구호라는 의견도 많았다. 내년 정부예산 중 복지 분야 비중은 크게 늘어난 반면 미래성장을 위한 연구개발(R&D) 쪽과 경제 활성화, 일자리 창출은 별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1인당 세금 부담이 550만원으로 올해보다 더 늘어난다는 보도에는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늘어날 세금 부담으로 인해 수년간 노력 끝에 얻은 외항·원양선원 비과세 급여액 한도인 현행 월 200만원이 300만원으로 인상되는 효과가 삭감되기 때문이었다. 모든 선원은 처음 하는 선상 투표에서 선택할 새로운 대통령이 무엇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고되고 외로운 바다 위에서라도 더 많은 친구들과 형제들이 함께 오래도록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경제 대통령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신헌철 SK미소금융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