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국 저승사자’ IMF의 대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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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왼쪽)와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오른쪽)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연차총회에서 재정긴축을 놓고 정면 충돌했다. 논쟁을 벌인 두 사람이 12일 연차총회 기념사진 촬영장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도쿄=블룸버그]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 등에 구제금융을 대주며 살인적인 긴축처방을 냈다. 또 고금리와 민영화·시장개방 등 거시경제 정책의 전환을 주문했다. 이른바 ‘IMF 요구조건(Conditionality)’이다. 그 조건이 너무 가혹해 국내에선 IMF가 ‘저승사자’로 불릴 정도였다.

 15년이 흐른 지금 IMF가 대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주문을 내놓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다. 그가 14일 막을 내린 올해 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서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재정긴축 정책을 정면 비판했다.

 그는 “유럽이 긴축정책을 자제해야 한다”며 “이제 시간 여유를 갖고 (긴축 효과를) 따져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리스뿐 아니라 스페인·이탈리아가 최근 추가 긴축안을 마련하고 있는 데 대한 경고였다. 저승사자에서 수호천사로의 변신이다.

 평소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하는 라가르드 총재가 돌출적으로 한 발언이 아니었다. IMF는 연차총회 개막 직전 영국 정부에 대해 허리띠 졸라매기를 대체할 성장 정책(플랜 B)을 강구하라고 권고했다.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15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쓴 칼럼에서 “(IMF의 변신은) 3~5년 정도 세계경제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서머스에 따르면 현재 글로벌 경제에선 두 가지 정책 패러다임이 충돌하고 있다. 하나는 부채축소를 중시하는 ‘정통파적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부양을 주장하는 ‘수요 진작론’이다.

 IMF는 82년 남미 외채위기 이후 약 30년 동안 긴축 진영의 첨병이었다. IMF는 80년대 초 줄줄이 외채 상환을 미루기로 선언(모라토리엄)한 남미에 군기반장으로 투입됐다. ‘방만하게 빚을 끌어다 잘 먹고 잘산 남미 국가들의 나쁜 버릇을 고쳐주라’는 미국 씨티·JP모건·체이스맨해튼 등 월가 대형 은행들의 성원을 등에 업었다. IMF는 급전(구제금융)을 대준 대가로 엄격한 거시경제 처방전을 내놓았다. 바로 고강도 재정긴축이었다. 그리고 공기업 민영화, 각종 규제 완화, 자본·외환 시장 개방 등의 주문을 곁들였다. 이 처방이 IMF 고문이었던 영국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이 89년 이름 붙인 ‘워싱턴 컨센서스’다.

 로이터통신은 “전문가들이 라가르드의 도쿄 발언을 워싱턴 컨센서스의 붕괴로 보고 있다”고 15일 전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 등의 비판에도 견고하게 유지됐던 워싱턴 컨센서스가 용도 폐기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세계경제의 중심, 즉 미국이 부채위기에 빠진 데 따른 예고된 수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동안 IMF와 워싱턴 컨센서스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그랬던 미국이 정작 위기에 처하자, 긴축을 회피하는 자가당착에 빠졌다. 미국이 긴축은커녕 제로금리와 재정방출 등 경기부양에 적극 나서면서 워싱턴 컨센서스는 ‘주인 잃은 강아지’ 꼴이 된 것이다.

 그 바람에 독일만 외톨이가 됐다. 독일은 그리스 재정위기 직후 워싱턴 컨센서스를 충실히 벤치마킹했다. ‘베를린 컨센서스’란 말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이런 독일에 라가르드의 발언은 변심이나 마찬가지였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이 발끈한 이유다. 그는 “IMF가 원칙을 저버렸다”고 반발했다.

 워싱턴 컨센서스의 후원자였던 글로벌 금융그룹들은 요즘 IMF의 전향에 동조하는 분위기다. 찰스 댈러러 국제금융협회(IIF) 회장은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이 빚을 죄악시하는 청교도주의적 흑백논리에 빠져 있다”며 “세계경제는 지금 성장과 개혁의 균형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IIF는 거대 금융그룹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그리스 국채 워크아웃을 주도해 왔다.

◆워싱턴 컨센서스=1980년대 초 외채위기에 빠진 남미 국가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미국 국무부·재무부·국제통화기금(IMF) 사이에 이뤄진 합의를 말한다. 구제금융과 부채 일부 탕감의 혜택을 주는 대신 강력한 긴축과 구조조정을 요구하기로 한 게 합의의 골자다. 이 용어를 1989년 처음 만든 존 윌리엄슨 전 IMF 고문은 “워싱턴 컨센서스가 재정긴축을 중심으로 민영화·시장개방 등 10여 개 정책으로 구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90년대 반세계화 바람을 타고 미국식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대외확산 전략을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용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무역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 등 상품과 돈의 자유로운 이동과 규제 완화를 표방한다. 한편 베를린 컨센서스는 남유럽 재정위기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독일 베를린 경제정책 담당자들 사이에 이뤄진 합의를 의미한다.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에 구제금융의 대가로 강력한 긴축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 내용은 워싱턴 컨센서스와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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