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관리 기능 통합 ‘컨트롤 타워’ 만들어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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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 발생한 경북 구미시 불산 가스 누출로 구미시 산동면 봉산리 일대 농가 피해가 크다. 멜론 등 농작물이 맹독가스로 인해 바싹 말라비틀어진 모습이 처참하다. [구미=뉴시스]

정부가 8일 피해지역 일원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피해자와 피해기업 등에 대한 보상 기준을 발표하면서 구미 불산 가스 누출사고가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번 구미 사고는 우리에게 풀어야 할 많은 숙제를 남겼다.

지난달 27일 사고 이후 보여준 정부의 미숙한 대응은 ‘총체적 난국’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사고 발생 일주일이 지난 4일에야 범정부 차원의 차관회의를 열고 정부합동조사단 파견을 결정했다. 그러는 사이 현지 주민은 유독가스에 시달렸으며 농작물과 가축 피해는 확산했다. 미숙한 초동 대응과 허술한 대처는 당국의 안전관리 수준이 무방비나 다름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우리 주변에는 유독물 취급업체가 상당히 많다. 일부는 주택가 부근에까지 파고들어와 있다. 이 기회에 정부는 유독물질 관리 전반에 대해 현황을 다시 파악한 뒤 필요한 안전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화학물질 생산량에서만 세계 5위를 자랑할 게 아니라 안전도 선진국 수준이 되도록 총체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인근 주민에게 위험성 알린 적도 없어
대한의사협회는 10일 “사고 발생 초기 현장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통제 인력의 경우 개인 방호조치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환경과학원의 오염지역 불산 수치 측정이 간이측정법으로 이뤄져 정확성이 떨어지는 데도 주민들의 복귀를 결정해 혼란이 가중됐다”고 덧붙였다. 사고 후 구성된 ‘구미 환경대책 TF’에 의학적 판단을 내릴 전문가가 포함되지 않은 점, 급성기가 지난 후 집단적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이 우려되는 데도 대책이 전무한 점 등도 의사협회는 지적했다. 12일 열린 소방방재청 국정감사에서 진선미(민주통합당) 의원도 “첫 119 신고를 받았을 때 불산 가스 사고임을 소방관들이 알았는 데도 화학보호복을 갖추지 않고 출동해 불산에 노출됐다”며 소방방재청 자료를 공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구미산업단지엔 유독성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공장이 1662곳이나 되지만, 소방서에 갖춰진 화학보호복은 18벌뿐이고 중화제는 아예 없는 걸로 나타났다.

누출된 불산에 물을 뿌린 소방당국의 대응이 적절했느냐도 논란거리다. 진 의원은 “중화제가 없어 물을 9000L나 뿌리는 바람에 오히려 불산 오염을 확산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기환 소방방재청장은 “불산은 20도가 넘으면 기체가 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 물을 뿌렸어야 했다. 다시 같은 상황이 되더라도 물을 뿌릴 것”이라고 반박했다. 환경부도 “불화수소 가스(불산이 기화된 형태)는 물 용해도가 크기 때문에 물을 뿌린 건 적절한 대처”라는 입장이다. 의사협회는 “물을 뿌리는 건 타당했지만, 오염 범위 확대를 막으려면 직접 살포가 아닌 분무 형태로 뿌렸어야 했다. 원칙적으론 중화제로 쓰이는 소석회(Ca(OH)2) 살포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전문가들 주장이 제 각각이기 때문에 추후 규명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고가 발생한 휴브글로벌 CCTV를 통해 확인된 가스 누출 당시의 상황. 가스가 순식간에 누출되면서 작업자를 뒤덮었다. [연합뉴스]

포스텍 생물학전문연구정보센터의 인터넷 게시판 ‘브릭(BRIC)’에도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글이 쏟아졌다. 이공계 전공자들의 공통된 지적 중 하나는 정부·취급사·주민 3자 공통적으로 불산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너무 없었다는 것이다. 불산은 실험실에서 다룰 때도 여러 보호장비를 착용해야 하는 맹독성 물질이다. 한 방울만 피부에 닿아도 바로 스며들어 뼈를 심각하게 손상시킬 수 있다. 취급할 땐 안전 규칙을 엄수해야 하고 불산을 취급하는 회사나 기관에 대한 정부의 관리감독이 철저해야 한다.

관련부처인 환경부와 행정안전부는 그런 위험성에 대해 적절한 사전 관리감독을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불산과 같은 유해물질을 다루는 업체가 인근 주민에게 위험성을 알리지도 않았고 비상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매뉴얼도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사고에선 행정 처리 위주로 된 위기관리 매뉴얼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사고 발생 상황에 대한 상세한 매뉴얼이 있었어도 사전 교육과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무용지물이었을 거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정부가 사고 지역을 발생 12일이나 지나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한 점만 보더라도 유해성물질과 관련된 재난 대처에 얼마나 취약한지 알 수 있다.

관리 대상 유독물 생산량 기준 낮춰야
해외에서 일어난 유해성 화학물질 사고의 대명사 격으로 언급되는 게 ‘보팔 참사’다. 1984년 인도 보팔에 있는 미국계 회사 유니언 카바이드의 살충제 제조 공장에서 일어난 독성가스 배출 사고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가스로 쓰인 포스겐과 시안화가스가 섞인 맹독성 가스 메틸이소시아네이트가 한밤중에 도시로 흘러나왔다. 하룻밤 새 3000명 넘게 사망했고 환경오염과 기형아 출산 등을 비롯한 여러 후유증이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최종 집계된 사망자 수는 약 3만 명, 피해자 규모는 약 15만 명으로 추산된다. 역사상 최악의 산업재해로 불린다.

구미 불산 가스 누출의 피해 규모는 보팔보다는 훨씬 작다. 하지만 발생 원인과 대처방식 등은 닮은 점이 많다. 구미 주민들도 보팔 주민들처럼 바로 옆 공장에서 위험물을 취급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연히 화학물질 누출사고가 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구미 주민들은 주위 농작물이 말라 죽는 걸 보고 나서야 이상을 느끼고 스스로 이주하거나 정부에 집단이주를 요청했다. 보팔과 구미 모두 작업장에서 안전 매뉴얼은 지켜지지 않았다. 추후 국내에서 유사한 재앙이 발생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이유다.

보팔 참사로 미국에선 화학물질 사고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다. 86년 ‘비상사태 계획 및 지역사회 알 권리에 관한 법(EPCRA?Emergency Planning and Community Right-to-Know Act)’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EPCRA는 재난 경보를 비롯한 비상사태 계획을 규정하고,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회사나 기관은 위험도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도록 했다. 우리는 2010년부터 환경부에서 ‘화학물질 배출·이동량 정보 조사·공개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 제도에 따르면 공개 대상은 불산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독물질을 연평균 10t 이상 취급하는 종업원 30인 이상 사업장이다. 휴브글로벌은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대상에서 빠졌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기준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다. 미국은 EPCRA에 따라 연간 100파운드(약 45㎏) 이상 취급하는 사업장이면 모두 정보를 공개하도록 돼 있다. 우리나라에 이런 사전 조치가 있었다면 구미 불산 가스 누출사고가 발생했을 때 정부나 주민이 덜 당황했을 것이다.

위험 화학물 관리, 여러 부처로 흩어져
미국의 연방재난관리청(FEMA) 같은 기구를 총괄 컨트롤 타워로 하는 재난관리시스템 정비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FEMA는 허리케인 등 심각한 재난이 발생했을 때 군대까지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우리의 소방방재청이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그런 권한이 없다. 석유화학단지 재난안전관리도 80개 이상의 법에 따라 환경부와 지자체, 소방서 등으로 3원화돼 있다. 재난 발생 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부처 간의 이해를 조율하다 보면 신속한 대응엔 한계가 있다.

일본의 예도 참고할 만하다. 일본은 75년 미쓰비시 석유공장 저장탱고 사고 이후 화학물질 관련 법령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2001년엔 내각부 방재 담당 대신이 재난관리에 관한 정부 부처의 유기적인 연계를 관할하도록 했다. 일본은 현재 중앙정부와 자치단체, 주민이 상호협력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중앙방재회의가 상설조직으로 가동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4000여 종의 위험 화학물질을 관리하는 부서만 해도 행정안전부·환경부·지식경제부·고용노동부 등으로 흩어져 있다. 화학물질 유통량은 급격하게 늘고 있고 취급시설도 전국에 산재돼 있어 사고 위험성은 날로 높아져간다. 구미 불산 누출사고나 2008년 김천 페놀수지 공장 화재사고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피해는 복합적이어서 일관적인 종합 재난관리의 필요성이 더 높아지고 있다. 행정안전부 소속기관으로서 소방방재청은 재난관리 총괄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하기엔 무리가 있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직속으로 상설 국가재난관리 부서를 만들고 여러 행정부서에 흩어져 있는 재난관리 기능을 모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재난관리와 같은 종합정책 연구는 인문사회·이공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한 융합형이 바람직하다. 사고 수습 매뉴얼을 만들려면 인문사회학자·화공학자·생태학자·기초의학자 등 이공계 전문가 등의 의견교환이 필수다. 행정안전부가 화학물질 사고를 포함한 위기관리 매뉴얼을 20개 갖고 있지만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안병길 칼럼니스트 - 안병길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로체스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국제지역원 조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미 캘리포니아에서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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