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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의 부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92호 16면

손가락으로 명주실을 퉁기는 소리와 못으로 철사줄을 치는 소리. 소리에 밝은 오디오 전문가는 LP와 CD의 차이를 이렇게 비유한다. LP는 종일 들어도 편안하지만 CD는 한 시간이면 귀가 아파온다. 느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소리의 질에 엄연한 차이가 있다. LP는 원음의 울림 그대로 소리 골을 파서 원판을 만들고 스탬프를 제작해 비닐을 눌러 만든다. 반면 CD는 0과 1의 조합으로 만들어 진 디지털 단속(斷續)음이다. 자연스러운 소리가 아닌 유사음이다.

그러나 LP는 CD에 자리를 내주었다. 관리하기 까다롭고 시간이 지나면 음질이 떨어지는 비닐 레코드는 무지개 빛깔로 반짝이고 잡음 없는 콤팩트 디스크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CD의 깨끗한 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먼지 뒤집어쓴 LP를 미련 없이 버렸다.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보급된 CD는 음반시장을 석권했다. 한국에서는 2004년 서라벌레코드가 LP 생산을 중단하면서 비닐 레코드의 명맥이 끊어졌다.

그랬던 LP가 소리 없이 부활하고 있다. 지름 30㎝의 큼직한 비닐판이 다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6월 서울 광장동에서 열린 레코드페어에서는 LP로 재발매한 ‘조동익-동경(憧憬)’을 사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1집 음반 ‘별일없이 산다’를 LP로도 발매했고 아이돌 그룹 2AM도 LP를 같이 냈다. 미국에서는 이미 뚜렷한 추세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에 400만 장 가까운 LP가 판매됐다.

LP의 부활을 지켜보던 공연기획자 이길용(40)씨는 지난 6월 경기도 경포에 ‘LP팩토리’를 차리고 직접 제작에 뛰어들었다. 1988년 독일에서 생산된 프레싱머신을 들여와 LP를 찍기 시작했다. 그사이 국내에서 LP 제작 기술은 소멸됐고 이씨가 들여온 기계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노하우를 깨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패티김 은퇴기념 앨범을 성공적으로 납품했고 조동익·림지훈·얄개들 등의 음반도 제작했다.

사진은 LP팩토리의 윤주현(33)씨가 김광석의 미공개 음원이 실린 판을 제작하는 모습이다. 육중하지만 정교한 기계가 검은 PVC 덩어리를 스탬프로 누르고, 냉각하고, 테두리를 손질해 반짝이는 LP를 한 장 한 장 찍어내고 있다. 윤씨는 얼마 전까지 인디밴드에서 드럼을 쳤다. 전구도 갈아 끼우지 못하던 기계치가 음악에 대한 열정만으로 음반 제작기계를 능숙하게 다루게 됐다!

LP의 앞날은 어떨까. 과거처럼 음악매체의 중심 역할을 하기는 힘들 것이다. CD마저 빠른 속도로 퇴장하고 있는 시절이다. 사람들은 이제 디지털 파일로 음악을 듣는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 LP의 부활을 불러왔다. 원래의 자연스러운 소리, 검게 빛나고 묵직한 존재감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길용 대표는 낙관적이다. “디지털의 홍수 속에서도 아날로그는 살아남는다. 아이돌 그룹들도 LP판을 내도록 만들겠다. 중·고생들이 휴대용 텐테이블로 비닐판을 돌릴 것이다. 옛날 아버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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