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메달 따면 유리 장식장 전시 예선 탈락 땐 뒷방에 다닥다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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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호 16면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 명인으로 꼽히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와 주세페 과르니에리(1698~1744)의 고향인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국제 바이올린 제작 트리엔날레’가 열린다. ‘현악기의 올림픽’이라고 불릴 만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현악기 제작 콩쿠르다.

이탈리아 크레모나 ‘현악기 올림픽’을 가다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니에리의 고향서 열려
올해 제13회 트리엔날레에는 각국에서 접수된 344대가 심사 대상이 됐다. 바이올린이 약 160대, 비올라가 약 100대, 첼로는 70대 정도. 콘트라베이스(혹은 더블베이스)는 몸집도 크고 제작이 어렵기 때문에 항상 10대 미만이 등록되는데 이번엔 이례적으로 지난번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접수 규정은 매우 까다롭다. 한 사람이 두 대의 악기를 접수시킬 수 있지만 다른 종류의 악기로 등록해야 한다. 다른 콩쿠르에서 입상한 작품을 접수시켜서도 안 되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린의 복제품도 안 된다. 기계로 제작한 부분이 있어도 안 되고 니스를 바르지 않고 뿌려서도 안 된다.

심사는 1차 외관 심사와 2차 소리 심사로 나뉜다. 제작자가 누군지 알 수 있는 표시나 사인이 악기의 내·외부에 표시된 후보작들은 제외된다. 전문가들은 나뭇결은 잘 살렸는지, 니스칠은 잘 되었는지 등의 기술적 숙련도에서부터 전체적인 조화, 자연스러움, 독창성 등을 꼼꼼히 점검한다.

1차 심사에서 500점 만점에 300점 이상을 받은 악기들만 제2차 심사인 소리 심사를 받게 된다.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악기들은 청중 앞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최종 심사를 받는다. 여기서 나온 점수를 1, 2차 심사의 점수와 합해 우승자를 정한다. 상금은 바이올린과 비올라 부문 금메달의 경우 1만5000유로(약 2200만원), 첼로와 콘트라베이스 금메달은 2만3000유로(약 3400만원)다.

9월 28일 크레모나 바이올린 뮤지엄에서는 올해의 수상작과 후보작이 공개됐다(전시는 10월 14일까지). 바이올린·비올라·콘트라베이스의 금메달 수상작들은 각각 유리 장식장에 멋지게 전시돼 있었다. 하지만 첼로 부문 금메달 수상작은 없었다. 점수에서 1등을 했더라도 금메달감이 아니면 상을 주지 않는다는 트리엔날레의 엄격한 원칙 때문이다. 제작 심사에서 300점 이상을 받지 못한 악기들은 뒤쪽 방에 다닥다닥 걸려 있었다.

비올라 부문 수상자인 울리케 데데러는 세 아이의 엄마로 트리엔날레 콩쿠르 역사상 최초의 여성 금메달리스트다. 전 세계에서 열리는 국제 현악기 제작 콩쿠르에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는 부지런한 워킹맘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악기를 재창조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악기 제작의 역사에 한 점을 찍고 싶을 뿐”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바이올린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울리히 힌스베르거는 현악기 제작의 달인으로 불리는 인물. 2006년 대회에서는 첼로 부문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첼로 부문 장려상 받은 유일한 한국인, 김민성씨
이 ‘악기 올림픽’에서 6년 전 한국인 최초로 본상을 수상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김민성(41)씨다. 2003년 크레모나의 바이올린 제작학교인 IPIALL(Cremona international violin making school)을 졸업한 후 2006년 제11회 크레모나 트리엔날레에 참가해 첼로 부문 동메달을 차지해 IPIALL 수료 후 최단기 수상자라는 영예를 안았다. 그 뒤 이탈리아 피소녜에서 열린 바이올린 제작 콩쿠르에서는 2008년 첼로 부문 금상, 2009년 은상을 수상했다. 2010년 5월 중국에서 처음 열린 제1회 국제 바이올린 제작 콩쿠르에서는 첼로 부문 금메달과 동시에 베스트 셋업 상을 한꺼번에 받았다. 2011년 제12회 헨리크 비니아브스키 국제 바이올린 제작 콩쿠르에서는 금메달과 베스트 셋업 상 등을 수상했다.

김민성씨는 이번에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첼로 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그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1차 제작 심사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우승을 노렸으나 안타깝게도 소리 심사에서 다른 참여자들에게 밀렸다”며 “제 첼로는 힘차게 활을 그어야 좋은 소리가 나도록 제작되었는데 소리 심사 때 연주자가 살살 연주해 제 소리를 못 낸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실 심사위원들마다 선호하는 음색이 있기 때문에 출품자들은 자신의 악기와 궁합이 맞는 심사위원을 만나는 운도 따라줘야 한다.

그가 말하는 현악기 제작의 포인트는 조화다. “좋은 나무와 그것을 디자인하고 두께를 조정해 다듬고 칠하는 일이 모두 중요합니다. 수많은 부품을 정교하게 조립하는 것도 어려운 부분입니다. 가장 힘든 것은 나만의 특징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놀 때도 공방에서 놉니다.”

김민성씨는 제작 부문 최고 점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참가자로 등록했기에 크레모나에서 활동하는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첼로를 만든 참가자에게 주는 ‘사비노 프레티(Sabino Preti)’ 특별상을 받지 못했다. 그는 크레모나에 자신의 공방이 있다.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현악기 제작자들은 자신의 공방에 제자들을 두고 같이 작업하지만 김민성씨는 혼자 제작한다. 제작한 악기는 한국·미국·독일 등에 판매한다.

전시장을 돌다가 김민성씨의 교수였던 클라우디오 아미게티를 만났다. 아미게티는 IPIALL에서 악기 복원 담당 교수로 콩쿠르의 심사위원은 아니지만 심사위원들의 어시스턴트를 맡았다. 참가작에 대한 소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해가 갈수록 제작의 정교함 부분은 점점 나아집니다. 마무리가 정확하고 좌우 대칭도 완벽하죠. 하지만 미적 부분에서는 나아지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림을 예로 들자면 사진처럼 정확히 묘사한 그림들만 있고 미켈란젤로나 카라바조같이 개성 있는 그림은 찾기 힘들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 여기 있어!’ 하고 등장하는 악기가 없다는 말이죠. 스트라디바리나 과르니에리는 정교하게 제작된 바이올린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개성 있는 악기들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만드는 법은 가르치지만 개성까지 가르쳐줄 수는 없습니다. 개성이 담긴 악기를 만들어야 장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손기술 좋은 쟁이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투명 플라스틱 바이올린, 앞뒤 판 짝짝이 첼로…
9월 28일부터 30일까지 크레모나 박람회장에서는 268개의 악기 관련 회사가 참가하는 ‘몬도무지카(Mondomusica)-크레모나 피아노포르테’ 악기 박람회도 열렸다. 올해 이 행사를 찾은 참가자는 1만4000여 명. 지난해보다 20% 늘어난 숫자다. 특히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에서 온 관계자는 30%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뮤지션들은 부스를 돌면서 마음에 드는 악기를 발견하면 바로 연주해 보고 가격을 묻기도 했다.

현재 중국 등 많은 나라에서 대량으로 현악기를 생산하고 있지만 크레모나에는 대량 생산 공장이 없고 모두 개인 공방에서 만드는 수제 악기들만 거래되고 있다. 박람회 참여 업체들도 국적 불문하고 대부분 공방 수준의 참가자들이었다.

박람회의 묘미는 새로운 실험작을 만날 때다. 독일의 현악기 제작자 스테그뮐러(Stegm<00FC>ller & Stegm<00FC>ller)가 특허를 낸 첼로는 뒤판이 앞판보다 작게 제작돼 울림이 더 좋다고 한다. 일본의 샤콘느 회사는 악기를 제작할 때 두께를 재지 않는다. 스트라디바리의 비밀을 발견했기 때문이란다. 이들은 두께와 상관 없이 악기의 모든 부분이 균일한 공명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론에 기초해 두께를 재는 대신 손가락으로 사방을 두드려 보아 같은 공명의 울림이 나는지 확인하면서 악기를 제작한다.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바이올린도 방문객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몬도무지카와 동시에 열린 피아노 박람회 ‘크레모나 피아노포르테’도 성황을 이뤘다. 지난해에 비해 앤틱 피아노의 등장은 드물었지만 그랜드 피아노 뚜껑의 내부를 유명한 그림으로 프린트한 아티스틱 피아노나 이어폰을 꼽고 언제나 연주할 수 있는 디지털 피아노들이 눈길을 끌었다. 몬도무지카 박람회는 내년부터 뉴욕에서도 열린다. 제1회 뉴욕 몬도무지카는 메트로폴리탄 파빌리온에서 3월 15일부터 3일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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