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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빚의 함정에 빠진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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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때로 깊은 함정에 빠질 때가 있다. 한번 떨어지면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멀리 있는 얘기가 아니다.

1960년대 이전 우리 경제도 함정에 빠졌었다. 소득이 너무 낮아 저축은커녕 소비지출과 투자가 부족하고, 이것이 다시 저성장과 저소득을 가져오는 빈곤의 함정이었다.

▶ 투자.소비위축의 악순환

최근의 일본 경제는 또 다른 함정에 빠져 있다. 제로 금리에서도 소비와 투자가 늘지 않는 함정이다. 더 이상 이자율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침체에 빠진 것이다. 이름 하여 유동성 함정이라고 한다.

미국도 30년대 초 극심한 대공황을 겪었고, 70년대 남미는 연 1만%가 넘는 인플레의 함정을 경험했다. 형평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사회주의의 실험도 대표적인 함정의 사례로 지적된다.

경제의 함정은 시공을 초월해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때로는 외부의 급격한 충격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시장에 역행하는 정치논리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경직된 정책이 주범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원인은 다양하지만, 어떤 함정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즉, 기존정책의 답습이나 일시적인 자금투입만으로는 함정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구조적 변화를 수반하는 엄청난 충격요법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탈출에 성공한 경제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고, 지도자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뒷받침됐던 것이다.

우리 경제가 빈곤의 함정에서 벗어난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과감한 외자도입과 수출지향적 개발전략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미국의 대공황도 뉴딜 정책으로 수습되었다.

모두가 공급만 강조하던 경직된 정책에 집착할 때, 수요를 늘려야 한다고 주창하지 않았는가. 한때 세계의 우상이었던 일본 경제를 보면 이런 교훈은 더욱 분명해진다. 침체의 늪에서도 기존정책만 되풀이하다가 불황으로 '잃어버린 10년' 을 겪었고, 내일마저 어둡지 않은가.

이것은 어찌 남의 나라 얘기인가. 지금 우리도 바로 '빚의 함정(debt trap)' 에 빠져 있다. 단기외채에 몰려 함정에 빠진 우리 경제는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빚은 기업에서 은행으로, 다시 정부와 가계부문으로 전가되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고 있다. 외환위기에서는 벗어났다고 하지만, 아직도 구조적 속성에는 큰 변화가 없다.

실제로 기업부채는 96년 말 5백4조원에서 올해 3월에는 6백40조원으로 증가했다. 부채비율이 낮아졌어도, 부채규모는 큰 변화가 없다. 정부부채는 21조원에서 85조원으로 급증했고, 개인의 빚도 2백15조원에서 3백2조원을 넘어섰다. 가계의 빚이 가구당 2천만원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총부채가 전체 국민소득의 1.97배에 달하고 있다. 빚은 줄어들지 않고, 경제 내부에서 주머니만 바꿔가며 더 누적되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빠른 회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빚의 함정에서는 과다한 부채에 짓눌려 투자와 소비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경기침체가 되풀이되는 구조적 위험을 안고 있는 셈이다.

▶ 흑자 내는 기업 환경 절실

따라서 안정적 성장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적정수준으로 빚을 줄여야만 한다. 그렇다고 공적자금이 해답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누군가가 갚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통화를 남발해야만 한다.

대안은 두가지 뿐이다. 외부에서 수혈을 받든, 우리 기업이 흑자를 내야만 빚이 줄어든다. 그래야 공적자금도 회수할 수 있고, 정부도 가계도 부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빚의 함정에서 헤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시급한가. 물론 효율적인 빚 관리와 구조조정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 절실한 것은 기업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흑자를 내게 만들어야 한다. 안일한 규제와 반시장적인 형평의식, 경직된 노사관계의 틀을 깨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아무런 충격도 없이 어떻게 늪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모두가 함정에 빠진 경제의 속성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정갑영 연세대 교수 · 경제학

▶약력〓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미 코넬대 경제학 박사 ▶저서〓『산업조직론』『한국의 산업조직』『민영화와 기업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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