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눈으로 그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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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어두운 전시장엔 차가운 금속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자 오퍼레이터가 내 눈에 맞춰 프로그램을 세팅해준다. 시선추적장치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기다림 끝에 맞닥뜨린 검은 스크린은 막막했다. 앞 사람이 그린 궤적이 파란 선으로 표시돼 있다. 그걸 길잡이 삼아 시선을 옮겨 본다. 우리는 늘 먼젓번 사람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본다.

 화면은 3차원, 좌우가 아니라 앞뒤로 전진하게 돼 있다. 시선은 의지대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며, 항상 움직이는 과정 중에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뜻대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3분쯤 지나면 장치는 멈추고 눈이 지나간 흔적대로 빨간 선이 표시된다. 우주에서 빨간 선과 파란 선이 만났다 헤어지며 한 장의 그림을 완성했다. 장치 뒤에는 눈으로 그려보고 싶어 하는 관람객이 길게 줄 섰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서울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에 출품한 미카미 세이코의 ‘시선추적기술(Eye-Tracking Informatics)’이다. 도쿄 다마미술대 교수인 미카미는 15년 전 이 작품을 고안했다. 전시작은 오픈 소스인 ‘아이 라이터(The Eye Writer Ver 2.0)’와 훨씬 빨라진 컴퓨터 등에 힘입어 다시 제작된 것이다. 원래는 두 개의 의자, 두 개의 화면을 통해 두 사람이 상대방의 자취를 좇으며 그려 나가게 돼 있어 다소 에로틱하다. 이번에는 한 세트만이 나왔다.

 ‘아이 라이터’는 눈동자의 움직임을 이용해 쓰고 그리도록 개발됐다. 2003년 루게릭 병으로 전신이 마비된 미국의 예술가 토니 콴을 위해 젊은 예술가·엔지니어 동료들이 만든 기기다. 콴은 이를 이용해 손 대신 눈으로 그렸고, 그림은 LA 도심의 건물 벽에 투사돼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삼성전자 창의력개발연구소는 올 초 이를 토대로 장애인을 위한 5만원대 보급형 안구마우스를 개발하기도 했다.

 작품 체험은 1차적으론 장애 체험이다. 어렵고 답답하고 익숙지 않은 과정이다. 건물 벽에 활개치며 그림 그리던 그래피티 아티스트 토니 콴 역시 장치에 익숙해지려면 한참 걸렸을 거다. 기술 발달로 많은 보조 기구가 나왔다. 장애인의 기본적 생활을 지원하는 것 외에 다소 ‘쓸데없을지도’ 모르는 예술 활동도 가능케 하고 있다. 작품은 또한 우리가 시각을 통해 막대한 정보를 얻고 있지만 실은 이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을 빨간 선과 파란 선의 궤적으로 보여준다. 이 ‘얼굴 없는 그림’엔 아이러니도 있다. 기기 사용을 위해선 자리에 앉아 수동적 조작을 기다려야 한다. 미디어 기술이 여전히 처해 있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