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KBS와 NHK 사장님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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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한·일 양국의 공영방송을 대표하는 두 분께 제가 이 자리를 빌려 글을 올리게 된 것은 최근 읽은 소설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잘 소개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유명한 하하키기 호세이(?木蓬生)씨가 쓴 『해협』이란 소설입니다. 일본에서는 『세 번 건넌 해협(三たびの海峽)』이란 제목으로 1992년 출간됐습니다. 출간 이듬해 제14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을 수상한 작품이며 하하키기의 출세작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20년이 경과한 지난달에야 일본어 전문 번역가인 정혜자 선생의 손을 거쳐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깊은 감동과 함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제 말 강제징용에 얽힌 국가의 폭력과 개인의 상처를 소재로 이런 문학적 성과를 이뤄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驚異)였습니다. 소설은 경상북도 상주의 산골에 살던 17세 소년 하시근이 1943년 어느 날 날벼락처럼 강제동원돼 끌려간 규슈의 탄광에서 겪은 강제노역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고문과 린치, 인간 이하의 대우와 착취가 일상화된 다카쓰지 탄광은 작가의 표현대로 ‘광기에 휩싸였던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속살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소설에서 하시근은 대한해협을 세 번 건넙니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줄 알고 강제로 끌려가면서 처음 건넜고, 탄광을 탈출해 숨어 지내다 해방과 함께 귀국하면서 다시 건넙니다. 두 번째 건널 때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공사판에서 우연히 만나 운명적 사랑에 빠진 전쟁미망인 출신 일본 여인 치즈(千鶴)와 동행합니다. 홀몸이 아니었던 치즈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포기했지만 하시근의 가족과 고향 사람들은 그를 차갑게 외면합니다. 딸을 찾아 상주까지 찾아온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치즈는 갓난아기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사업가로 성공한 하시근은 세 번째로 해협을 건넙니다. 장성한 아들과 해후한 그는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처참하게 숨져간 탄광 동료들을 생각하며 필생의 과업을 수행합니다. 강제징용의 상징인 폐석산(탄광에서 석탄을 캐낼 때 나오는 잡석과 저질탄 등을 산처럼 쌓아 만든 돌 더미)을 허물어버림으로써 과거의 흔적을 지워버리려는 일본인들의 시도를 아들과 함께 무산시키고, 탄광 노무감독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들을 악랄하게 괴롭혔던 조선인을 끌어안고 폐석산에서 동반자살합니다.

 철저한 자료 조사와 현장 취재, 관련자 증언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쓸 수 없는 작품입니다. 소설 형식을 취했지만 논픽션 다큐멘터리로 읽힙니다. 문학과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정신과 의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하하키기의 치열한 작가 정신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냉철한 역사의식입니다. 작가는 하시근의 입을 빌려 “역사는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 빛을 발하는 법”이라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한 역사는 잠깐은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진정한 생명력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독일이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고 끊임없이 역사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자신의 행위에 눈을 감고 타국을 유린했던 역사의 흔적을 망각으로 덮어버리려 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저는 『해협』을 읽으며 한·일 양국 국민을 위해 이 소설을 영화화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니 고야마 세이지로(神山征二郞) 감독에 의해 95년 이미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재일교포 청년상공인회의소가 중심이 돼 모금한 7억 엔이 종잣돈이 됐다고 합니다. 당시 서울에서 시사회까지 열렸지만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기 전이라 아쉽게도 ‘영화 없는 시사회’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제가 두 분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한·일 양국 국민이 공영방송을 통해 이 영화를 조속히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떠나 두 나라 국민은 불행했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독도와 과거사 문제로 한·일 양국 국민의 서로에 대한 친밀감은 10년 전 한·일 월드컵 이후 최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로를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또 하나는 KBS와 NHK가 공동으로 이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양국의 배우와 제작진이 대한해협을 오가며 몇 부작 시리즈로 공동제작해 내년 8·15에 맞춰 두 나라 공영방송이 동시에 방영하면 좋겠습니다. 국민이 역사의 양 측면을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공영방송의 책무이자 사명입니다.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해협』을 두 공영방송에서 볼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