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의료 포럼] 지놈혁명 어디까지 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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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지놈사업의 완성으로 촉발된 지놈혁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눈앞에 닥친 지놈시대의 명과 암에 대해 엇갈린 전망들이 많다.이에 중앙의학포럼은 전문가 대담을 통해 지놈연구의 현황과 과제에 대해 살펴보기로 했다.

최근 서울중앙병원이 주최한 ''유전체-단백질 연구와 미래의학'' 국제 심포지엄에 강연차 참석한 미국립보건원(NIH) 유전병연구소 레슬리 비세커소장(44) 을 중앙의학포럼위원인 울산대의대 서울중앙병원 생화학교실 송규영교수가 만났다.

미국일리노이의대 출신의 소아과 의사인 비세커소장은 99년 당시까지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던 허스증후군(Hers syndrome) 유전자를 발견하는 등 어린이 유전질환 연구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다.

- 한국 방문이 처음이라고 들었다. 유전병연구소란 무엇하는 곳이며, 당신은 현재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

"유전병연구소는 미 국립보건원 내에서도 다국적 컨소시엄을 구성해 인체지놈사업을 완성한 미 국립인체지놈연구소(NHGRI) 의 산하기관으로 유전성 대사질환 등 유전병의 원인과 진단.치료법을 연구한다. 나는 손가락이 여섯개인 육손이 등 팔과 다리에 나타나는 기형질환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

- 사람은 동물과 달리 인도적 이유에서 유전자 조작이나 교배 등 인위적 실험이 불가능하다. 육손이 등 사람에게 나타나는 유전질환의 유전자는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는가.

"그래서 등장한 것이 폐쇄집단에 대한 연구다. 우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거주하는 아미시란 종교집단을 대상으로 연구하고 있다.

1750년 유럽에서 이주해온 2백명이 지금까지 한 지역에서만 살아 7만여명의 자손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자동차나 TV 등 현대문명을 거부하며 종교적 신념으로 혈족끼리만 결혼한다. 이 때문에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전질환 6개가 이들에게서 발견됐으며, 내가 찾아낸 허스증후군도 그 중 하나다.

수백년동안 잘 보존된 유전자 덕분에 가계도가 일목요연하게 그려져 유전질환을 연구하는 데엔 안성맞춤이다. "

- 지난해 완성된 인체지놈사업으로 유전병을 비롯한 난치병이 극복될 것이라는 기대에 들떠 있다. 인체지놈사업은 유전병 극복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인체지놈사업이 완성되면서 연구속도가 급격히 빨라지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한 개의 질병유전자를 찾아내기 위해선 25명의 박사후과정 연구원이 5년을 꼬박 매달려야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명의 박사후과정 연구원이 1년만 연구하면 가능하다. 앞으로 봇물 터지듯 유용한 연구결과들이 나올 것으로 본다. "

-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란 말이 있다. 인체지놈사업으로 30억쌍의 염기서열이 모두 밝혀졌지만 실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이들의 기능까지 알아내야하는 것 아닌가. 지금도 연구실로 암이 언제 치료되느냐며 묻는 전화가 많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단일유전자에 의한 유전병은 부모에서 자녀로의 대물림 패턴이 명확하므로 발견이 쉽지만 암이나 심장병 등 대부분의 난치병은 수십개의 유전자가 동시에 관여하며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병든 유전자를 찾아내 제거하고 정상 유전자를 삽입하는 이른바 유전자 치료가 실제 암 환자에게 적용되려면 앞으로도 수십년의 세월이 걸릴지 모른다. "

- 유전병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지놈연구가 가속화되면서 현재 1천2백여개의 유전자가 밝혀졌지만 이는 진단 수단으로만 활용될 뿐 실제 치료와는 거리가 멀다.

"맞다. 치료란 측면에선 아직 환자에게 큰 도움이 못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결과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기형관련 유전자는 대부분 마치 금속의 주형을 뜨듯 신체 부위의 모양을 결정짓는 단백질 합성에 관여한다. 이들은 대부분 열에 취약하다.

실제 산모가 더운 지역에 살거나 임신 도중 체온이 올라가는 열병을 앓게 될 경우 기형아가 많이 발생한다는 보고도 있다. 간접적이긴 하지만 기형아 예방을 위해 사우나 등 뜨거운 생활환경은 피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다.

진단도 중요하다. 간이 붓고 키가 자라지 않는 허스증후군의 경우 과거 바늘로 배를 찔러 간조직을 떼어내는 검사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유전자의 발견으로 면봉으로 구강점막의 세포 일부만 떼어내면 진단이 가능하다. "

- 지놈혁명은 의학뿐 아니라 철학과 사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전인가 환경인가'' 가 핫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극단적인 유전자 예찬론자는 ''교통사고도 조급한 성격에 관여하는 유전자 탓'' 이라는 주장을 편다.

"질병의 유무는 물론 성격과 지능 등 개체가 지닌 특성은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이다. 어느 한 가지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증후군'' 이란 질환의 유전자가 있다면 조급한 성격이 나타날 수 있다. 이들에겐 유전자 치료가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조급한 성격을 지닌 사람의 일부분일 뿐이다.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선 유전자보다 안전벨트 착용과 과속방지 교육이 정답이다. "

- 지놈시대에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 개인의 유전정보 누출이다. 특히 회사의 직원 채용시 악용할 소지가 높은데 미국에선 이로 인해 말썽을 빚은 적은 없는가.

"윤리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에서도 최근 한 철도회사가 고용인을 대상으로 수근터널증후군이란 질환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있는지 검사하려다 고소당한 적이 있다.

수근터널증후군이란 손목 사이로 신경이 지나가는 터널이 좁아져 손가락이 저리고 아픈 병이다. 회사는 노동력 상실을 우려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근로자들의 사생활이다. 개인의 유전정보는 당연히 보호돼야 한다. "

- 유전자 조작을 통한 맞춤형 인간의 탄생은 어떻게 보는가. 키가 크고 머리가 좋은 아기를 원하는 부모들이 많을텐데.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우선 ''할 수 있는가'' 의 문제인데 결론적으로 현재 기술로 맞춤형 인간은 불가능하다.

우리 세대에선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보다 중요한 관점은 ''해도 되는가'' 로 질병유전자가 아니라면 키나 지능 등 유전자를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 "

- 암 치료는 물론 노화의 극복까지 지놈을 둘러싼 수식어는 꿈의 시대를 예고하는 장밋빛 일색이다. 일반인들은 지놈혁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두 가지만 강조하고 싶다. 첫째 유전과 환경은 둘 다 중요하다. 그러나 아직까진 환경이 더 중요하다. 환경은 유전과 달리 의지대로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지금까지 언론에 등장한 숱한 지놈관련 연구결과가 실제 병원에서 환자의 치료에 응용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들떠 있기보다 차분하게 기다릴 필요가 있다. 지놈은 분명 큰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당장 실현할 수 있는 마법의 칼은 아니다. "

정리=홍혜걸 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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