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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틴 경제] 금융권 벽 허물기 이제 시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틴틴 여러분도 사채(私債)라는 말을 들어봤죠. 사채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것이 일수(日收)입니다. 돈을 빌린 다음 정해진 기간에 매일 원금과 이자를 나눠 갚는 것을 말하죠.

얼마 전부터 전북은행은 일수 대출을 하고 있어요. 점잖은 은행이 사채업자나 하는 일수 대출을 한다니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은행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금.적금을 받아 돈이 필요한 기업이나 개인에게 빌려주는 일입니다.

예금주인 고객에게 주는 이자(수신금리)보다 대출한 뒤 받는 이자(여신금리)를 높게 해 그 차액만큼 은행이 벌어들이는 것이지요.

은행들은 그동안 주로 기업들과 신용이 좋은 개인에 대한 대출이나, 부동산 등을 담보로 한 대출을 많이 해왔어요.

하지만 요즘 은행들은 옛날과 다릅니다. 은행이란 이름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상품들을 취급하고 있어요. 전통적인 예금.대출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품을 내놓고 있답니다.

많은 은행이 '오토론' 이라는 이름으로 자동차 구입자금을 빌려주고 있습니다. 오토론은 원래 현대캐피탈이나 삼성캐피탈 같은 할부금융사의 상품이지요.

할부금융사는 자동차나 가전제품처럼 비싸지만 한번 사면 오래 쓰는 상품(내구재)을 사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매달 원금과 이자를 나눠 받는 곳이에요.

은행들은 또 급전이 필요한 사람에게 몇백만원을 빌려주거나 전문직종을 위한 대출상품을 활발하게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상품들은 사실 그전에는 신용금고의 몫이었어요. 중소기업 대출 전문은행이었던 기업은행이 택시기사를 대상으로 내놓은 신용대출 상품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네요.

전북은행처럼 사채시장과 경쟁하는 은행도 있습니다. 제일은행도 '퀵 캐시론' 이란 상품으로 소액 급전대출에 뛰어들었습니다.

급전대출이란 말 그대로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채시장 못지 않게 빨리 돈을 빌려준다는 얘기지요.

대출을 받는데 2~3일 기다리기 어려워 높은 이자에도 불구하고 사채시장을 찾는 사람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지요.

기업은행 등 일부 은행은 중소기업에 대출한 뒤 6개월이 지나면 대출금을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출자전환 옵션)가 붙은 대출상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출보다 투자에 가까운 것이죠. 사실상 벤처캐피털의 영역에 진출한 것입니다.

벤처캐피털은 말 그대로 '모험자본' 입니다. 벤처기업에 지분을 투자해 나중에 그 기업이 성공해 주식 값이 오르면 주식을 팔아 대출금을 거둬들이는 것이죠.

성공하면 투자원금의 몇십배까지 벌 수 있지만 실패하면 원금까지 날리기도 합니다.

이밖에 건설장비 구입자금을 대출해주는 은행도 있습니다. 리스회사가 하는 일을 은행이 하는 셈이지요. 리스란 기업에 필요한 장비를 리스회사가 대신 사서 일정기간 해당 기업에 사용료(리스료)를 받고 빌려주는 것입니다.

투자신탁회사의 주식형.채권형 펀드를 사기 위해 아직도 투신사나 증권사만을 찾는 분들은 없겠지요.

은행에서도 펀드형 상품을 팔고 있습니다. 은행 입장에선 이런 펀드형 상품을 파는 게 예금 받는 것보다 수익률이 높다고 하네요.

은행에서 은행상품과 투신상품을 섞은 형태의 물건도 팔고 있습니다. 국민은행이 최근 내놓은 '빅맨황금분할투자상품' 이 그것인데, 투자금을 은행 정기예금과 투신권 펀드에 4대 1의 비율로 나눠 투자하는 상품이지요.

상품뿐만 아닙니다. 보험 설계사처럼 고객을 찾아다니며 적극적으로 영업하는 은행도 생겼습니다.

보험사뿐만 아니라 종금사.할부금융사.신용금고 등 지점 수가 얼마 안되는 제2금융권 기관들이 주로 애용하던 방식이었는데, 최근 은행권에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씨티은행은 다이렉트 스태프라 불리는 이동영업사원 1백여명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은행도 모기지 브로커란 이름으로 50명의 대출전문 영업팀을 구성, 월 평균 1천억원대의 대출실적을 올리고 있답니다.

이처럼 은행들이 다른 금융업종의 업무까지 침범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돈이 많이 풀리고 금리가 낮아진 탓입니다.

전에는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은행 직원이 앉아서 기업이나 신용이 좋은 사람만 상대해도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여윳돈이 많아지고 금리가 낮아져 그전처럼 장사하다간 살아남기 어렵게 된 것이죠. 그러니 돈이 될 만한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다가가고 진출하는 것입니다.

또 '금융권의 벽 허물기' 라는 세계적인 추세도 은행이 다른 시장에 뛰어들도록 하고 있습니다.

특히 외국 선진 금융기관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다양한 금융상품을 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행의 개인 자산관리 서비스(PB;Private Banking), 증권사의 종합 자산관리 서비스인 랩 어카운트나 보험사의 실적배당형 상품인 변액보험 등 은행과 증권.보험사의 영업행태를 합친 성격의 겸업화 상품들이 은행.증권.보험사간 경쟁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품들은 금융권간 경쟁이 과거 일부 상품의 경합관계에서 금융권 구분 자체를 무의미하게 하는 본격적인 경쟁관계가 찾아왔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다른 금융권에서도 은행들이 자기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습니다.

오토론 시장을 침식당한 할부금융회사들은 대출전용카드를 만들어 은행의 대출 업무에 도전장을 냈지요. 금융기관끼리 경쟁이 치열할수록 소비자로선 금융상품을 고르는 여유가 생기고 재미도 커질 것 같습니다.

서경호 기자 prax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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