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재개발·재건축 포기 후폭풍 … 땅속에 묻힐 사업비 누가 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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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가구당 평균 4600만원. 경기도 부천시 춘의1-1 재개발구역이 사업을 포기하면서 물어야 할 비용이다. 이 구역 재개발조합은 최근 시공사인 대우건설과 GS건설로부터 325억2000만원을 내놓으라는 공문을 받았다. 주민들의 뜻에 따라 재개발 사업이 중단되자 시공사가 그동안 조합에 운영비 등으로 빌려준 돈과 손해배상금 등의 명목으로 청구한 금액이다.

조합원이 700명인 이 구역은 주민 절반 이상의 동의를 받아 지난달 17일 조합을 해산했다. 주택경기 침체로 재개발해 봐야 손해볼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사업에 반대하는 주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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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재개발조합 총무 한정순씨는 “매몰비용이 당초 예상보다 너무 많아 어떻게 비용을 마련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부동산 활황세를 등에 업고 무분별하게 추진된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구조조정하는 출구전략 길목에 매몰비용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업을 덮으면서 그동안 들어간 손실비용 부담을 둘러싼 논란이 출구전략의 발목을 잡을 조짐이다. 매몰비용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으면 출구전략이 자칫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지난 2월 출구전략이 실행된 뒤 재개발·재건축 구역들이 잇따라 사업을 접고 있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 고덕2-1 재건축구역 주민들은 이달 초 구청에 재건축 추진위 해산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8월엔 서울 중랑구 면목 3-1 재개발구역이 주민 54.3%의 동의를 받아 사업을 그만뒀다. 사업을 접기 위한 실태조사 요청도 잇따라 현재까지 서울에서 55개 추진위나 조합이 구청에 신청했다. 구청의 실태조사 결과 주민 과반수가 찬성하면 추진위나 조합이 취소된다.

 경기도에선 부천시 소사본6-B재개발구역·광희아파트재건축구역, 수원시 세류동 113-5재개발구역, 안산시 선부동4재건축구역, 안양시 서림주택재건축구역 등이 추진위나 조합을 해산했다. 인천에서는 용현7구역 등 4곳이 추진위나 조합 문을 닫았고, 7곳은 시의 주민 의견조사를 거쳐 해산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이제까지 서울·수도권에서 10여 개 구역의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자발적으로 취소됐다.

 그런데 추진위나 조합 해산으로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완전히 끝나는 게 아니다. 그동안 들어간 돈 정산 문제가 남아 있다.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주민들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시공사로부터 빌린 돈으로 진행된다. 사업이 무산되면 시공사는 빌려준 금액의 회수에 나선다. 매몰비용 결산인 셈이다.

 문제는 매몰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 수원시 113-5구역에 날아온 청구금액은 46억원으로 가구당 2600만원 정도다. 아직 드러난 매몰비용이 많지 않아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자치단체와 업계의 추정 금액을 종합해 보면 한 개 구역당 추진위 단계 25억원, 조합은 180억원 정도로 예상된다.

 주민들이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어난 매몰비용은 ‘뜨거운 감자’가 될 조짐이다. 지난 2월 출구전략이 시행되면서 관련 법에 매몰비용 일부를 자치단체에서 보조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지만 후속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지금으로선 대부분의 주민이 부담해야 할 판이다. 그나마 서울시만 최근 기준안을 만들었을 뿐 다른 자치단체들은 재원 부족을 이유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자치단체들은 “도심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법령에 근거해 추진된 사업이므로 매몰비용의 일부를 국비에서 보태야 한다”는 입장이다. 나아가 일부에선 현행법에 추진위로 국한돼 있는 비용 보조 대상을 조합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정부는 나랏돈을 보태는 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사업비 부담과 개발이익이 주민에게 돌아가는 민간사업의 손실을 국가가 지원하는 것은 국가 재정의 사용 목적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매몰비용을 지원하면 쉽게 사업을 포기하려는 도덕적 해이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도시개발사업 등 다른 민간개발사업과 형평성 문제도 나온다. 국토부 주택정비과 박승기 과장은 “사업에서 발을 빼기가 쉬워져 한꺼번에 많은 추진위나 조합이 해산되면 체계적인 도시환경 정비사업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말했다.

 매몰비용 문제를 오래 끌수록 출구전략 성공은 어려워진다. 돈 문제로 주민 간, 주민과 시공사 간 갈등이 커지면서 시장이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매몰비용은 건설업계에도 불똥이 튄다. 재개발·재건축 사업장에 빌려준 돈이 적지 않다. 현대건설은 3000억원, GS건설은 4000억원이 각각 투입됐다. 전문가들은 매몰비용 해결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문한다. 시간 여유도 별로 없다. 현행법은 출구전략은 2014년 1월 말까지 2년간 한시적으로 시행된다. 건설산업연구원 두성규 실장은 “매몰비용 처리가 출구전략 성공의 열쇠”라며 “이번에 제대로 ‘부실’ 사업장을 털어내지 못하면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수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말했다. 건국대 부동산학과 이춘석 교수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보다 조금씩 양보하는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안장원·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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