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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89) 탄후이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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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정부 시절 중국 최고 권력자들의 야유회. 장쉐량(왼쪽 첫째)은 쑹즈원(왼쪽 둘째), 장제스(왼쪽 여섯째), 쿵샹시(왼쪽 일곱째) 세 가족과 친분이 두터웠다. 쑹씨 세 자매 중 쿵샹시의 부인 쑹아이링(왼쪽 넷째)과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왼쪽 다섯째)은 함께 어울렸지만 쑹칭링은 쑨원 사후 자매들과 결별하다시피 했다. 왼쪽 셋째는 장쉐량 부인 위펑즈. [사진 김명호]

장쭝창(張宗昌·장종창)은 봉천군벌 중에서 거친 축에 속했다. 봉천파 영수 장쭤린(張作霖·장작림) 부자라면 모를까, 쑨원의 유해를 없애 버리겠다는 개고기 장군(장쭝창의 별명)을 꺾을 사람은 중국 천지에 없었다. 영구를 지키던 탄후이촨(譚惠全·담혜전)은 쑨원의 아들 쑨커(孫科·손과)에게 달려갔다. 남편의 유지를 계승하겠다며 모스크바로 떠난 쑹칭링과는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탄후이촨은 장쭤린의 장남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이 쑨원이 보낸 휘호를 받고 몸 둘 바 몰라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쑨커에게 장쉐량을 소개만 시켜 달라고 청했다. 해질 무렵, 장쉐량은 불청객의 면담 요청을 허락했다. 27세의 청년원수는 50대 초반의 충직한 경호원을 안심시켰다. “네가 누군지 잘 안다. 내가 저지하겠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연락해라.”

장쉐량은 장쭝창을 불러서 호통을 쳤다. “비윈쓰(碧雲寺)까지 가서 행패 부렸다는 말을 들었다. 다시 그러면 가만 내버려두지 않겠다.” 난징의 국민정부에도 급전을 보냈다. “유해를 하루빨리 남쪽으로 옮겨라. 무슨 흉측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1991년, 연금에서 풀려난 장쉐량은 64년 전에 만난 탄후이촨을 회상한 적이 있다. “90 평생에 그처럼 애절한 눈빛을 본 적이 없다.”

1927년 10월, 비적들이 쑨원의 유해를 탈취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장쉐량은 탄후이촨에게 방법을 일러줬다. “동굴이 가장 안전하다.” 11월 25일 밤, 탄후이촨은 레닌이 보낸 소련제 관에 방부처리된 쑨원의 유해를 옮겼다. 시산(西山)에 인간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깊은 동굴이 많았다.

1928년 6월 4일, 장제스가 지휘하는 북벌군이 베이징을 압박했다. 근거지 동북으로 철수하던 장쭤린은 선양(瀋陽) 인근에서 폭사했다. 범인은 일본 관동군이었다. 동북의 지배자가 된 장쉐량은 봉천군벌을 해체시키고 장제스의 난징정부에 합류했다.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한 장제스는 장쉐량을 부위원장에 임명하고 베이징을 포함한 5개 성의 통치권을 일임했다. 탄후이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쑨원의 유해도 비윈쓰로 돌아왔다.

이듬해 1월, 난징에 쑨원의 능원(陵園)이 완성됐다. 이장(移葬) 준비를 마친 국민정부는 탄후이촨에게 공문을 보냈다. “비윈쓰의 금강보전을 총리 의관총(衣冠塚)이라 명명하고 탄후이촨에게 관리를 맡긴다.”

쑨원의 유해가 베이징을 떠나는 날 소련에서 돌아온 쑹칭링은 탄후이촨을 붙잡고 통곡했다. “미욱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간 주름살이 늘었다. 내가 없더라도 의관총을 잘 보호해라.”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국민정부는 탄후이촨에게 지급하던 봉급을 중단했다. 탄은 부인이 식모살이 해서 벌어온 돈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의관총을 떠나지 않았다.

신중국 수립 후 비윈쓰는 베이징 원림국(園林局)에 귀속됐다. 탄후이촨도 고정 월급을 받았다. 1956년 11월 12일, 쑨원 탄생 90주년 기념행사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의식을 마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각계 대표들과 의관총을 찾았다. 83세의 탄후이촨은 44년 전 쑨원이 준 옷에 쑹칭링이 직접 달아줬던 훈장 비슷한 것을 가슴에 붙이고 총리를 안내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사람이 기록을 남겼다. “쑨원 선생의 목숨을 구한 후에 받은 기념품인가” “맞다” “상금은 없었나” “40원 받았다” “계속 받았나” “아니다” 저우언라이는 매달 40원을 추가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탄후이촨이 받는 액수가 조직 내에서 가장 많다며 재고를 요청하는 간부가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당과 정부에 기웃거리지 않고, 평생 한가지 일만 한 사람에게 표하는 예의”라며 일축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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