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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비권 스타일’에 맥 못추는 검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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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왼쪽부터 이정희, 이석기, 김어준.

지난 5월 23일 오후 4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에서 통합진보당 대학생 당원 신모(21)씨 등 9명이 ‘통합진보당 정치 탄압 중단하라’란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기습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곧바로 경찰에 연행됐지만 약속한 듯 입을 닫았다. ‘묵비권’을 행사한 것이다.

 경찰은 이들이 신원 확인조차 거부하는 통에 이름을 알아내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경찰 관계자는 “묵비권에 대해 사전 교육을 받은 것처럼 대응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그달 25일 신씨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공안사건이나 정치인 관련 사건에서 특히 그렇다. 서울 관악을 지역구 여론조사 조작 의혹을 받은 이정희(43) 전 통진당 대표는 지난달 21일 검찰 소환조사에서 묵비권을 행사했다. 검찰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이 전 대표를 무혐의 처분했다. 지난달 28일 ‘CNC 국고 사기’ 의혹으로 검찰에 소환된 이석기(50) 통진당 의원도 묵비권을 행사했다. 검찰 관계자는 “벽(壁)을 수사한 심정이었다”며 “소환엔 응했지만 답한 것이 없어 사실상 조사한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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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법 속 권리’로 여겨진 묵비권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 건 한명숙(69) 전 총리다. 한 전 총리는 재임 중인 2006년 12월 곽영욱(72)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공기업 사장직 인사 청탁과 함께 5만 달러를 받은 혐의(뇌물 수수)로 두 차례 법정에 섰다. 한 전 총리는 검찰 수사 내내 묵비권을 행사했다. 당시 재판에선 “검찰이 진술을 강요했다”는 한 전 총리 측 주장과, “진실을 말한다면 왜 검찰 신문을 피하느냐”는 검찰 측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법원은 1~2심에서 한 전 총리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검찰은 묵비권이 정당한 권리 행사 차원이 아닌 ‘방어 전략’으로 변질됐다고 지적한다. 검찰 관계자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피의자들은 검찰을 불신해서라고 하지만, 재판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려는 의도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캐나다 연방대법원은 “묵비권은 절대권이 아니다. (묵비권을) 지나치게 적용해 범죄 해결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건 헌법상 권리를 넘어서는 것”이란 내용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창현(49)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묵비권을 행사했을 경우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가중 처벌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의자 진술에만 의존하는 식의 검찰 수사 관행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증거 위주로 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묵비권 때문에 검찰 수사가 막힌다면 그만큼 수사력이 약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그럴수록 증거를 확보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묵비권(默秘權)=피의자·피고인이 수사·재판 중에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헌법 12조 2항은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묵비권 행사로 인해 법적 제재나, 양형상 불이익을 받는 것은 금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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