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신인문학상/시 부문 당선작]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황은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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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황은주

[일러스트=강일구]

아삭, 창문을 여는 한 그루 사과나무 기척

사방四方이 없어 부푸는 둥근 것들은 동쪽부터 빨갛게 물들어간다

과수원 중천으로 핑그르르

누군가 붉은 전구를 돌려 끄고 있다

당분간은 철조망의 계절

어두워진 빨강, 눈 밖에 난 검은 여름이

여름 내내 흔들리다 간 곳에

흔들린 맛들이 떨어져 있다

집 한 채를 허무는 공사가 한창이고

유독 허공의 맛을 즐기는 것들의 입맛에는 어지러운 인 이 박혀 있다

죽은 옹이는 사과의 말을 듣는 귀

지난가을 찢어진 가지가 있고 그건 방향의 편애

북향에도 쓸모없는 편애가 한창이다

비스듬한 접목의 자리

망종 무렵이 기울어져 있어 씨 뿌리는 철

서로 모르는 계절이 어슬렁거리는 과수원

바람을 가득 가두어놓고 있는 철조망

사과는 지금 황경 75도

윗목이 따뜻해졌는지 기울어진 사과나무들

이 밤, 철모르는 그믐달은

풋사과처럼 삼만 광년을 달릴지도 모른다

[시 당선 소감]

습관처럼 혼자 서 있던 모퉁이 그 그늘이 고맙다, 축복이었다

사과 속에서 한 철을 살았다. 병실 침대에 누워 무의식과 의식을 오가던 계절이 있었다. 문득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고, 그때 단단히 잠겼던 동쪽의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동쪽을 편애한다. 동쪽 바람 길에 핀 꽃을 흠모하고, 동쪽으로 가는 새떼들을 경외하고, 무작정 동쪽 바다를 그리워하며 떠나고는 했던 내 시의 여정을 사랑한다.

 세상이 만화라면 늘 주인공 주변을 흘깃 쳐다보며 정지해 있는 존재 없는 행인이었다. 그러나 펼쳐지는 몇 칸에 행인은 존재하고, 넘어가는 낱장들에도 행인은 존재해 있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행인의 눈으로 시를 써 왔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사실이라는 말 주머니 밖에서 들리는 진실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때로 주인공이 아닌, 부딪치는 또 다른 행인의 이야기가 가까이 다가왔다. 통증으로 인해 가슴 너울지는 날들을 견뎌야만 했다. 무릎 꿇고 엎드려 겸손해지는 법을 배웠다. 두려웠던 방향의 기후들과 담담히 마주할 수 있었다. 습관처럼 혼자 서 있던 모퉁이 그늘이 고맙다. 축복이었다.

 친구들과 둘러앉아 요란하게 수다를 떨어야겠다. 동부학원 선생님들과 함께 웃어야겠다. 백운사 법륜 스님께 감사 드린다. 심사위원님들께 감사 드린다. 두 명의 언니가 있어서 행복하다. 가족을 위한 만찬을 준비해야지. 신재야, 얼른 집으로 내려오렴.

 손바닥이 가장 못생긴 햇볕이 내어 준 가장 맛있는 사과를 먹는 중이다. 따뜻하다. 여전히 물고기자리의 얼룩을 지우며 밤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나의 엄마’께 이 소식을 전하는 중이다.

◆ 황은주=1966년 강원도 홍천 출생, 상명대 불어교육과 졸업, 현재 수원 동부학원 강사

[시 심사평]

발랄한 상상력, 풋풋한 사유 오랜 시적 내공을 느꼈다

시 본심 심사 중인 시인 장석남(왼쪽)·장석주씨. [신인섭 기자]

새롭게 찾은 사물의 성질, 감각의 명증성, 모국어를 최적화할 수 있는 약동(躍動), ‘진탕만탕 생명력의 잔치’(보들레르) 들이 잘 어우러져야 야무진 시다. 거꾸로 관성과 타성에 기대는 것, 중속(衆俗)의 수다와 너스레, 조악한 모국어 사용 습관, 남의 것 흉내내기 따위는 무른 시의 속성이다.

 최종적으로 방소씨의 ‘다운의 계절’, 조상호씨의 ‘適(적)’, 황은주씨의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등이 남았다.

방소씨의 시들은 화법과 시각의 유니크함이 눈에 띄었지만, 대상에서 취해야 할 것과 버릴 것들에 대한 분별에서 느슨했다. 그런 결과로 시가 둔탁해졌다. 당선을 겨뤘던 조상호씨의 시들은 이미지 교직(交織)의 촘촘함에서 발군이었다. 이미지의 세공(細工)에서 남다른 시적 조탁의 능력을 엿보게 하지만, 의미의 쇄말주의에 갇힌 아쉬움과 응모한 시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아서 다음을 기약하고 제쳐졌다.

 황은주씨의 시들은 시적 수련의 내공을 감지하기에 충분했다. ‘활’에서 ‘동지를 돌아온 달의 북쪽을 끝점으로 정했다’라는 힘찬 첫 구절은 이어지는 느른한 감상주의의 물타기로 인해 그 매혹이 반감되고 만다. 내심 당선작으로 꼽았던 ‘활’을 제치고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죽은 옹이는 사과의 말을 듣는 귀/ 지난가을 찢어진 가지가 있고 그건 방향의 편애/ 북향에도 쓸모없는 편애가 한창이다’ 같은 구절에서 그 수일함은 도드라진다. 미숙함이 없지 않고 오장육부를 뒤흔들 만한 놀라운 개성은 아니지만, 사유의 풋풋함과 상상력의 발랄함은 황씨의 미래 가능성에 신뢰를 갖게 한다.

 끝으로 오병량·권수찬·김은석·양안다씨의 응모작도 인상 깊게 읽었다. 두 심사위원은 그들에게서도 상큼한 도약을 보여줄 수 있는 시적 재능과 개성의 촉을 확인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본심 심사위원=장석남·장석주(대표 집필 장석주)

◆예심 심사위원=권혁웅·김민정

시 본심 진출작(13명)

● 고태관 : ‘비밀의 기분’ 외 4편

● 권수찬 : ‘한식제’ 외 6편

● 김소현 : ‘몽롱 검정 물감’ 외 4편

● 김은석 : ‘가정법 고양이’ 외 4편

● 김준현 : ‘가까운 사이’ 외 5편

● 김태형 : ‘육중함의 가난’ 외 4편

● 방소 : ‘다운의 계절’ 외 4편

● 양안다 : ‘카멜을 피는 밤’ 외 4편

● 오병량 : ‘아니라면 안일한’ 외 4편

● 윤선영 : ‘툰드라의 춤’ 외 4편

● 이규진 : ‘아령 방랑기’ 외 4편

● 조상호 : ‘그 페이지를 기억한다1’ 외 4편

● 황은주 : ‘활’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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