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피치] 늘어난 몸쪽 승부, 쓰러지는 타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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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타석에 서있어 주실래요?"

아직도 그 경험을 잊을 수 없다. 1991년 베이징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당시였다. 경기가 없던 어느 날 국가대표팀 훈련 중 불펜에서 투구하던 한양대의 구대성이 기자에게 타석에 들어서달라고 요구했다. 투구 감각을 잡기 위해 타석에 서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다른 선수들은 모두 타격 연습을 하고 있어서 부탁한 것이다.

선뜻 그 부탁에 응했다. 곁에 있던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섰다. 어차피 휘두를 것도 아니었다. 구대성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슈슈슈~욱. "

"악!"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그 자리에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하얀 물체 하나가 뱀이 수풀을 헤집는 소리를 내며 내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맞으면 죽는다' 는 생각이 들었지만 워낙 빨라서 피할 수 없었다. 구대성이 시속 1백50㎞가 넘는 '광속구' 를 던질 때였다. 바로 그 공을 체험한 것이다.

'맞았다' 는 생각과는 달리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포수의 미트에 꽂힌 그 공은 무릎쪽에 바짝 붙는 몸쪽 스트라이크였다. 겁에 한껏 질려 손을 내저으며 타석 밖으로 나왔다. 그 이후 다시는 경기 도중 몸쪽 공을 피하는 타자에게 "맞고 나가라" 는 야유를 보낼 수 없었다. 무게 1백45g의 야구공이 시속 1백40㎞ 이상으로 날아올 경우 타자에게까지 0.5초가 안걸리며 그 충격 압력은 1t이 넘는다. 타자가 공을 때릴 것인가 아니면 피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0.25초 미만이다.

따라서 "공을 끝까지 보고 때려라" 는 말은 야구가 만들어낸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보는 순간 공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대신 투수가 타자의 몸을 겨눌 경우 공을 피하기는 불가능하다. 0.25초 안에 타석 밖으로 몸을 날릴 수 있는 타자는 없다.

몸맞는공은 맞는 순간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후유증이 심각하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지난 5일 현대 심정수는 롯데 강민영의 공에 얼굴을 맞아 광대뼈가 부러져 8주 이상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됐다.

같은 날 삼성 진갑용은 두산 박명환의 볼에 맞아 손가락이 부러졌다. 두산 심재학은 삼성 갈베스에게 오른발 뒤꿈치를 맞았다. 이들은 모두 한창 타격감이 좋은 상태였으나 다친 이후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브리또(SK)는 몸맞는공 때문에 '우울증' 에 걸릴 정도다. 그는 올시즌 벌써 15번이나 투수 공에 맞았다. 브리또는 결국 지난 9일 삼성 배영수가 던진 공에 목덜미를 맞은 뒤 경기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최근 타자들의 '두려움' 을 역이용하는 투수도 눈에 띄고 있다. 투수가 타자의 몸을 공격하고, 이런 현상이 번진다면 결국 모두가 다친다.

선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빈볼은 동업자 의식을 저버린 비신사적인 행위로 발전적인 스포츠맨십과는 거리가 멀다.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주의 환기' 가 필요한 시점이다.

※ 이태일의 인사이드 피치 리스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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