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가 vs 폭군 … 영화와 책으로 만나는 광해군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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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조선 15대 왕 광해군(1575~1641).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그는 연산군과 함께 묘호(廟號·임금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호)조차 없는 군주로 남았다. 집권을 위해 동생(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미(인목대비)를 끌어내린 패륜 군주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중국 명·청 교체기에 밖으로 자주권, 안으로 개혁정치를 펼쳤다는 시각도 있다.

 문화계에 광해군 재조명이 일고 있다. 13일 개봉하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추창민 감독, 이하 ‘광해’)는 개혁가에 무게중심을 뒀다. 자신을 빼 닮은 천민과 자리바꿈을 하는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백성을 생각하는, 진정한 군주가 돼간다는 팩션(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결합한 장르)이다. 반면 신간 『광해군』(너머북스)은 그의 집권기를 ‘조선의 잃어버린 15년’이라 잘라 말한다. 대선정국 광해군의 두 얼굴이 주목받고 있다.

 ◆역사와 허구의 결합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왕과 천민 1인 2역을 연기한 이병헌. [사진 CJ엔터테인먼트]

‘혈투’(2010), ‘최종병기 활’(2011) 등 광해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다수 있었지만 ‘광해’처럼 인간 광해군을 조명한 영화는 거의 없었다. 영화는 광해군 일기에 수록된 짧은 글귀(“숨겨야 할 일들을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다”)를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15일간 사라진 광해의 행적을 상상력으로 꾸며낸다.

 영화는 취약한 정치기반 탓에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광해(이병헌·1인 2역)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천민 하선을 대신 왕좌에 앉히고 안전한 장소로 피해있는 동안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똑같이 생긴 왕과 천민이 자리바꿈을 하는 설정은 세종을 주인공으로 앞세운 ‘나는 왕이로소이다’(지난달 8일 개봉)와 같다. ‘광해’는 임금 노릇을 하는 천민이 정치적 자각을 거쳐 현실정치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보다 정치적이다.

 하선은 대동법 시행, 명을 돕기 위한 원군 파견 등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사안에서 “정치적 노림수보다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라”며 중신들을 꾸짖는다. 하선이 자신 대신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숨진 궁녀를 안고 울부짖는 장면이 하이라이트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 통치자의 최고 덕목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왕좌에 복귀한 광해는 하선의 행적에서 깨달음을 얻고 백성을 위하는 왕으로 거듭난다. 그런데 심각한 정치드라마로 가기에 부담을 느낀 듯 곳곳에 집어넣은 코미디 요소가 극의 흐름을 방해한다. 감동을 끌어올리려는 호위무사의 비장함도 작위적이다.

 영화평론가 김형석씨는 “민생·외교 등 현실정치와 맞닿아있는 대목이 많다. 리더십에 대한 대중의 갈증을 우회적으로 달래준다”고 말했다.

 ◆현실정치가의 면모

광해군을 보는 역사학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광해군』을 쓴 오항녕 교수(전주대 역사문화학과)는 광해를 어리석고 정책판단 능력이 빈약한 왕이었다고 폄하했다.

 오 교수는 “광해군은 궁궐재건 등 무리한 토목공사로 재정과 민생을 파탄 냈고, 국무회의인 경연(經筵)에도 참석하지 않는 등 소통에도 실패한 군주였다”고 주장했다. 반면 역사학자 이덕일씨는 “소수세력인 대북파만으로 정치적 외연을 좁힌 잘못은 있지만 대동법 시행, 『동의보감』 편찬 등 백성의 처지를 개선하려 노력했다”며 “전쟁을 피하려 했던 국제정치 감각도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역사학계는 대체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명의 쇠락과 후금(청)의 부상, 일본의 재침 위협 등 격랑의 국제정세 속에서 현실외교를 펼쳤다는 것이다. 한명기 교수(명지대 사학과)는 “광해군은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강대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고민하고 적극 대처하려 했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격랑도 17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광해군의 현실감각이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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