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불황에 베팅하는 수퍼 리치들 … 30년짜리 국채 인기몰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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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상식 파괴는 곳곳에서 일어난다. 금리도 예외가 아니다. 11일 첫 발행된 만기 30년짜리 국고채 금리는 국고채 20년물보다 낮았다. 만기가 긴 채권일수록 금리도 높다는 공식이 깨진 것이다.

 이날 발행된 30년짜리 국채 4000억원 가운데 1400억원은 3.05%에, 나머지 2600억원은 3.08%에 팔렸다. 같은 날 금융투자협회가 고시한 20년물 금리는 3.08%로 같거나 더 높았다. 심지어 1주일짜리 기준금리(3%)와도 0.08%포인트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30년짜리 국고채 금리가 이렇게 낮아진 건 그만큼 사려는 세력, 즉 ‘사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 투자자의 수요가 예상 밖으로 많았다. 돈 냄새 잘 맡는다는 ‘수퍼 리치’(고액자산가)가 매수에 나선 것이다. 프라이빗 뱅커(PB) 사이에는 증권사가 이번 발행 물량 중 절반(2000억원)을 개인에게 팔 것이라는 얘기가 돌 정도다. 자산가의 관심이 높자 증권사도 적극적이다. 첫 30년 만기 국채는 인수단(하나·BNP파리바은행, KDB대우·동양·삼성·SK증권)만 살 수 있었지만 11월 경쟁입찰 방식으로 전환되면 대부분의 증권사가 개인을 대신해 국채를 사오는 ‘입찰 대행’ 서비스를 할 계획이다.

 채권 발행자인 정부는 낮은 비용으로 사상 첫 30년물을 성황리에 발행하게 됐으니 반색하는 분위기다. 장기채권을 발행하면 재정이 안정된다. 집안살림과 마찬가지로 나라살림도 수시로 갚을 빚 만기가 돌아오면 돌려막기에 급급하게 된다.

 하지만 길게 보면 장기채에 수요가 몰리는 것, 그래서 장단기 금리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은 못 된다. 이론적으로 장단기 금리 역전은 장기 불황을 예고하는 신호다. 투자자가 저성장으로 이어지는 장기 불황에 베팅하고 나선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유직열 삼성증권 SNI 강남파이낸스센터 지점장은 “저성장과 저금리가 이어질 것이란 인식이 자산가 사이에 보편화돼 있어 장기채권을 확보하자는 심리가 강하다”고 말했다. 앞으로 금리가 더 떨어지기 전에 미리 많이 사두자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다만 최근의 장기채 수요 급증과 그에 따른 장단기 금리 역전을 온전히 불황의 전조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첫 발행인 데다 분리과세 혜택 등 각종 이유로 수요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장기 채권 값에 거품이 끼었다는 지적이다. 채권시장 전문가는 이를 ‘스퀴즈’라고 부른다. 소수의 시장 참가자가 유통물량이 부족한 채권을 독점적으로 사들여 금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흉작에 안 그래도 과일 값 오르는데 사재기 하는 사람이 늘어 실제가치 이상으로 과일 값이 폭등하는 것과 비슷하다.

 김상훈 하나대투증권 연구원은 “저성장에 장기금리가 떨어지는 추세는 맞지만 요즘의 장기금리 하락폭은 과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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