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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박 전 대통령 말 후보 박근혜의 생각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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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남의 얼굴도 아니고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은 매우 드문 행동이다. 극단적 분노에 휩싸이지 않는 한 하기 어려운 짓이다. 하지만 세상이 하도 험악하다 보니 저절로 침 뱉고 싶어지는 때가 늘어난다. 다행히 침은 죽거나 다치게 하는 직접적인 흉기는 아니다. 최대한의 경멸과 혐오를 담아 분사하는 비폭력. 그게 침의 힘이다.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은 단순한 ‘눈에는 눈’ 응징을 넘어선다. 너는 죽었어도 도저히 용서 못하겠다는 상징행위다. 복수의 극한이다. 프랑스 소설가 보리스 비앙의 누아르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백인 처녀를 사귀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동생을 위해 복수에 나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이야기다. 1978년도 영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역시 잔혹한 복수극이다. 집단 강간을 당한 제니퍼 힐스라는 여성이 가해자들을 차례차례 죽인다. 소설·영화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어쨌든 둘 다 무덤에 침을 뱉을 만한 사연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침이 형사사건 아닌 정치와 결합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 얘기다. 박 전 대통령은 생전에 기자들에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생애를 깐깐하게 추적해 온 언론인 조갑제씨가 저서 제목에 이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박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목을 패러디한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후자를 대변한다. 발칙한 글쓰기에 능한 진중권씨답게 책에서는 ‘그게 사실은 이런 거예요. 옛날에 까만 선글라스 낀 참개구리가 살았대요…’라며 박 전 대통령 사후 후계자들이 무덤가에 둘러서서 침을 뱉게 된 ‘사연’을 비꼰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어제 라디오에 출연해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나라를 위해서 노심초사하셨습니다.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다 함축돼 있다, 이렇게 저는 생각하고요”라고 말했다. 진행자가 물은 5·16, 유신 평가에 대해서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내 무덤에 침’ 발언에서 시대를 초월한 소명의식·단호함을 읽는 이가 많을 것이고, 그 반대도 있을 것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박근혜 후보의 말처럼 지나간 시대가 아니라 미래다. 많은 이가 궁금해하는 것은 딸의 아버지 평가가 아니라 대통령 후보의 전임 대통령 평가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로 시작하는 취임선서(헌법 69조)를 하겠다는 사람으로서 과거의 헌정 중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만약 대통령이 되면 똑같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오연한 태도를 취할 것인지 궁금한 것이다. 이 점만큼은 역사가 아니라 본인 앞에 답안지가 놓여 있는 것 아닐까.

글=노재현 기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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