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대통령 자리도 내친 외교무대 ‘철의 여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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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호 28면

미국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에서 선진국으로 알려졌다. 다만 정치권력 세계에선 이른바 ‘유리천장’(Glass Ceiling)이 아직 존재한다. 여성의 정계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뜻한다.미국 역사를 보면 여성 대통령 또는 부통령이 나온 적이 없다. 두 명의 여성 부통령 후보가 있었지만 모두 낙선했다. 1984년 민주당 대선 후보 월터 먼데일의 러닝 메이트였던 이탈리아계 여성 정치인 제럴딘 페라로와 2008년 대선 때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가 지명한 알래스카 주지사 세라 페일린 등이다. 그러나 수석 장관인 국무장관 자리엔 현재의 힐러리 클린턴 여사를 포함해 모두 세 명의 여성이 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사진)는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이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미국 첫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의 이라크 폭격은 “불가피” 옹호
올브라이트는 1937년 체코 프라하에서 마리에 야나 코르벨로바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유대인이다. 올브라이트란 성은 59년 결혼했다 82년 이혼한 남편의 성이다.아버지 요셉 코르벨은 외교관이었다. 38년 나치 독일이 보헤미아-모라비아(체코)를 병합하자 코르벨은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가서 체코 망명정부에서 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코르벨은 유고연방 주재 체코 대사로 근무했지만 48년 체코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그해 가족과 함께 미국에 망명했다. 57년 그녀와 가족 모두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올브라이트는 보스턴 인근 소재 명문 여자대학교인 웰즐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결혼 후에도 존스홉킨스대·컬럼비아대에서 국제정치학으로 각각 석사·박사 학위를 땄다. 전문 분야는 소련·동유럽이다. 프랑스어· 러시아어·체코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올브라이트는 81년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백악관 안보특보였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보좌관으로 관계와 인연을 맺는다. 이후 조지타운대에서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 중 88년 민주당 대선 후보 마이클 듀커키스의 외교 고문직을 맡는다.

92년 대선에서 당선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올브라이트를 유엔 대사로 발탁했다. 대사 재직 중 유고 내전에서 일어난 인도적 범죄에 대해 유엔의 적극 개입을 촉구했다. 그래서 당시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녀는 르완다 인종 학살에 무기력함을 보인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결국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했던 부트로스 갈리는 연임되지 못한 최초의 유엔 사무총장이 됐다.

96년 클린턴은 올브라이트를 64대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외교수장이다. 미국은 총리제가 없기 때문에 국무장관은 총리급에 버금가는 수석 각료다. 또 대통령 유고 시엔 부통령→하원의장→상원 임시의장(상원의장은 부통령 겸직) 다음 네 번째로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있는 자리다. 물론 올브라이트의 경우는 외국에서 출생한 미국인이므로 이런 승계 규정이 적용되지 않지만 그래도 여성으론 최초로 미국 최고위 연방 공직을 맡았다는 점에서 당시 화제가 됐다.

올브라이트는 재임 중 적지 않은 외교적 업적을 남겼다. 중동 평화를 위해 클린턴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98년 와이협정(Wye Accord) 타결에 참여했다. 체코·헝가리·폴란드 등 옛 공산권 중부 유럽 국가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참여를 관철시켜 나토 확대를 주도했다. 유고 내전에 대한 미국의 적극 개입을 이끌었다. 보스니아 내전 종식을 가져온 95년 데이턴 협정의 후속 조치를 적극 추진했다. 다만 미국의 대이라크 폭격에 대해선 강경론을 폈다. 특히 미국의 공폭으로 많은 이라크 민간인이 희생된 데 대해 “유엔 제재 차원에서 이뤄진 불가피한 조치”라고 말했다. 보스니아·코소보·르완다 내전의 인종 청소를 강력 규탄했던 그녀가 이라크의 인도적 문제에 대해선 다른 입장을 보인 것이다. 2000년엔 미국 정부 고위 인사론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미국·북한 간 관계개선을 시도하기도 했다.

2001년 올브라이트가 국무장관직에서 퇴임하자 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은 자신의 후임으로 그녀를 영입하고 싶다는 제의를 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현재 조지타운대 명예교수로 출강하면서 ‘올브라이트 그룹’이란 국제전략문제 컨설팅기구를 설립해 다국적기업을 대상으로 자문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미국 외교평의회(CFR) 이사직도 맡고 있다.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땐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지만 현재는 오바마 대통령 진영에서 외교문제 자문을 맡고 있다.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는 강대국 미국의 외교를 이끌면서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조지 W 부시 정권에선 콘돌리자 라이스 그리고 현 오바마 행정부에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여성 국무장관의 맥을 잇고 있다.

“어릴 땐 내가 유대인인지 몰랐다” 주장
올브라이트는 한때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에 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해 세간의 오해를 불러온 적이 있었다. 38년 그녀의 가족은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결혼 후엔 미국 성공회로 다시 개종했다. 올브라이트는 어린 시절 자신이 유대인인지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녀의 조부와 인척이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실로 미뤄보아 그녀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과거 유럽 유대인은 유대인 정체성을 숨기려 했다. 타인의 경계 대상이나 박해의 표적이 될 것을 두려워해서다. 그리고 미국 유대계 명사 중 일부는 평생 유대인임을 숨기다가 죽은 후 뉴욕타임스지 부고란을 통해 유대인임이 밝혀진 경우도 있었다.오늘날 유대인들은 미국을 위시한 세계 주요국에서 경이적인 성취를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젠 오히려 유대인이란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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