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는 돌발사태 대처할 결단력이 최우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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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호 07면

조용철 기자

노재봉(76·사진) 전 국무총리는 “국가 흥망의 열쇠는 경제가 아닌 정치 문제”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정치처럼 무시되는 건 별로 없다. 뭐든지 경제 중심으로 생각한다. 그러다가 외환위기(IMF 경제위기)가 온 거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정치 복원이야말로 한국의 과제인 데다 한국처럼 변화가 빠른 사회는 언제든지 돌발사태가 가능하기 때문에 신속한 결단력이 한국 지도자의 제일 덕목”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아이콘’ 노재봉 전 총리, 차기 리더십을 말하다

6일 발족한 ‘치국경륜(Statecraft) 리더십 포럼’ 창립 총회에서다. 포럼은 대선을 100여 일 앞두고 차기 지도자가 갖춰야 할 리더십을 찾기 위해 이날 서울 명동의 은행회관에서 발족됐다. 대선 전 네 차례의 포럼을 열고 정리된 입장과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다. 윤여준 전 의원, 남경필·김성곤 등 여야 의원, 김병준·김명자 전 장관 등 고위 공직을 맡았거나 맡고 있는 30여 명이 회원으로 참가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총리를 지낸 노재봉 전 총리는 박학다식(博學多識)과 직설적인 화법 탓에 재임 중 ‘강성 총리’로 불렸다. 이후 김영삼 정권의 초기 개혁정책에 대해선 보수논객을 대표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 그가 이날 포럼 발제를 통해 한국 사회에 바람직한 정치 리더십에 대한 견해를 내놨다. 6일 노 전 총리를 만나 연말 대선과 지도자의 리더십에 대해 물었다.

소련 망한 건 권력의 정치·경제 독점 탓
-왜 정치가 국가 흥망을 좌우하나.
“미국과 소련의 대결에서 미국이 이긴 이유를 대라면 다들 시장경제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살기 위해선 두 가지 기둥이 필요하다. 하나는 생물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고 다른 하나는 그런 경제활동을 위해 사람을 관리해야 한다. 사람을 관리하는 게 정치다. 미국과 소련을 비교하면 소련은 권력이 정치와 경제를 독점했다. 그게 효율적이라고 주장했지만 1%의 텃밭에서 소련 전체 감자의 60%가 생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에 미국은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을 분리했다. 그래서 시민사회가 별도로 존재하게 됐다. 경제가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 체제 탓에 한쪽은 망하고 다른 한쪽은 살아남았다. 남북한을 대비시켜도 똑같다. 북한이야말로 소련의 전체주의 모델을 그대로 물려받은 체제 아닌가. 본질적으로 정치가 국가의 흥망을 좌우한다. 정치를 무시하는 국가는 유지되기 어렵다.”

-우리 정치는 어떤가.
“조롱과 불신의 대상이다. 대선을 앞두고 아무 조직도 없는 한 사람의 컴퓨터 엔지니어가 대선에 나가네, 마네 하고 있는데 그런 게 먹혀드는 상황이다.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가 아니다. 안철수 현상이란 건 기본적으로 국회나 정당이 국민에게 신뢰를 받지 못해서 생겼다. 문제는 정치권이 스스로 이런 현상을 만들었다는 거다. 구체적으론 두 가지다. 첫째는 정통성에 대한 컨센서스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못했다. 5·16은 쿠데타가 맞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냉전시대 공산주의와 맞서 최전선에 있었다.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사회를 개혁해야 했는데, 박정희 쿠데타 세력이 해낸 거다. 터키·파키스탄 등 세계적으로 그런 나라가 많았지만 유일하게 대한민국만 해냈다. 그런데도 정통성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둘째는 게임의 룰이다. 공정해야 하는데 그렇질 못하다. 우선 새누리당은 대선 후보를 뽑는 데 여론조사를 반영했다. 여론이란 게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데 왜 계산에 넣나. 헌정 파괴다. 야당의 모바일 투표란 건 완전히 사기다. 이런 투표는 없다. 두 가지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철수 현상이 생긴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한국 정치는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한민국은 수립되고 60여 년간 혁명을 겪었다. 민주화를 겪었고 수천 년 농경사회를 20여 년 만에 산업사회로 변화시켰다. 남은 과제는 산업사회에서 수반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국민 국가를 완성하는 통일 문제다. 민주화와 산업사회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는 양극화와 복지다. 그런데 복지를 현재의 관료 시스템으로 확대하는 건 어렵다. 한국 사회의 부정부패 방식이란 게 과거와 다르다. 예전엔 봉투에 담긴 돈 몇 푼 받는 게 전부였지만 이젠 그게 아니다. 예산 규모가 엄청나게 커져 갈라 먹으면 된다. 약탈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청난 개혁을 해야 한다. 더 어려운 역사적 과제는 통일 문제다. 통일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한 체제가 무너져야 가능한 일이다. 단순하게 인류학적 의미에서 하나가 되는 것만도 아니다. 하루아침에 법을 통과시킨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도 어쨌든 근대국가의 완성을 위해 정치가 이끌어 내야 한다.”

경제 민주화보다 공정성 확보 바람직
-양극화 해소를 위해선 정치권이 ‘경제민주화’를 주장하고 있지 않나.
“경제민주화란 용어가 너나없이 똑같이 갈라 먹자는 뜻이 돼선 안 된다. 용어를 민주화가 아니라 ‘공정성 확보’로 바꾸는 게 좋겠다. 산업 사회는 경쟁을 피할 수 없다. 다만 가능한 한 공정해야 한다. 파리엔 백화점이 없다. 두 군데 있는데 형편없다. 파리에 우리나라 수준의 백화점이 들어오면 중소상인이 다 들고 일어날 거다. 그런데 우리는 중산층으로 올라오려고 하면 다 죽여 버린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양극화를 흔히 경제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게 아니다. 강남 3구를 보자. 거기에 사회를 리드하는 사람이 많이 산다. 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곳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신분 상승의 욕망을 느낀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반적으로 생산성을 올려 생활 수준을 높여야 하지만 성공의 다양성을 많이 만들어주는 것도 필요하다. 정치 의식과 경제 의식이 복합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문제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어떤가.
“‘비핵ㆍ개방 3000’이 나왔을 땐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책은 남북문제를 경제적인 걸로 해결하겠다는 사고가 깔려 있다. 하지만 남북문제는 경제적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북한의 우선순위는 경제가 아니라 혁명이다. 북한에게 경제란 어떻게든 다른 나라를 협박해서 뜯어내고, 유지만 되면 끝이다. 목표는 카리스마적 혁명 체제에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냉전이 끝나고 산업사회를 거치며 국민 모두가 어떤 문제를 생각할 때 경제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정치의 존재는 무시되거나 망각된다. 다만 현 정부 대북정책이 비현실적이긴 해도 비핵을 일관성 있게 유지했다는 점에선 인정할 대목이 있다.”

-북한은 변화 조짐이 있다고 보나.
“북한의 변화란 게 체제 변화가 아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해온 방식의 부작용을 완화하려는 거다. 아주 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군정치의 방향을 튼다는 정도도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에서 가장 앞선 서열이 군이다. 경제권을 잘못 박탈했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핵이 있다고 망하지 않는 건 아니다. 지금 북한은 둑이 터질 때처럼 물이 새고 있다.”

안철수, 민주당 업고 나올 땐 黨 사라져야
-정부의 성공과 실패 기준은 뭔가.
“시대 과제를 잘 요리해 나가느냐의 문제다. 또 권력과 권력 주변의 부패 문제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성공했나, 실패했나.
“성공이나 실패로 단정해 말하긴 어렵다. 실패한 부분이 많지만 잘한 점도 있다. 세계화 시대에 맞춰 한국 경제를 발전시킨 점은 성공적이었다. 한국 경제를 다른 차원으로 바꿨다. 차기 대통령은 그 위에 올라서서 일을 해야 한다. 세계 정상들이 모이는 정상회담을 우리나라에서 개최했다는 게 얼마나 획기적인가. 다만 그것에 연계되는 국내적 조처를 하는 것엔 미흡한 점이 있다. 외국계 기업이 들어오고 자유주의가 강화되면서 구멍가게를 전부 죽여놓고 이웃까지 독점하는 이런 현상은 막아야 한다.”

-보수 논객으로서 한국 보수의 문제는 뭐라고 보나.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대북 문제다. 북한을 옹호하는 게 소위 진보인데, 그건 시민적 권리의 부재 체제를 찬양하는 거다. 진보가 아니라 반동이다. 한국 사회에선 인권과 시민의 기본권, 그것도 실질적인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게 민주화 운동이었다. 한국 사회에 들이대면 진보인데, 북한에 들이대면 보수다. 나는 보수와 진보로 가르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다. 정신분열 현상이 일어날 정도의 혼돈을 청산하지 못하는 게 우리 사회다.”

-차기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은 뭔가.
“우리에겐 경제보다 중요한 안보 문제가 있다. 또 내부적인 특수한 어려움도 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서 어떤 대선 후보가 자신의 이념과 정책에 대해 얘기해도 그대로 이행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래서 한국 지도자는 예측할 수 없는 돌발 사태가 생겼을 때 신속하고도 철학이 담긴 결단을 내려야 한다. 거기서 리더의 능력이 나온다. 예를 들어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 이전엔 누구도 위대한 리더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신속한 결단을 내리며 놀라운 리더십을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농지개혁 하지 않았나. 이건 경제구조나 정치구조에 있어서 혁명적인 조치였다. 북한처럼 소련의 사주를 받아서 한 게 아니라 엄청난 반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결단으로 돌파했다. 그런 과감한 결단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지금의 필리핀 정도에 불과했을 거다.”

-연말 대선을 어떻게 전망하나.
“안철수 교수가 민주당을 업고 나온다면 민주당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후보를 못 내는 정당이 어떻게 제 1야당인가. 그래도 그런 식으로 박근혜 대 안철수가 맞붙으면 팽팽할 테고, 3자 대결이 된다면 당연히 박근혜 후보가 이기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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