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유래] 송파구 석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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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민의 휴식처인 석촌호수 서호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석촌동은 우리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동네다. 마을에 돌이 많아 ‘돌마리(돌마을)’라고 불리던 데서 ‘석촌(石村)’이라는 명칭을 붙었다.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이후에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동 지역에 속해 있었다. ‘석촌리’라고 명명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의거해 경기도 내 각 면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정할 때의 일이다. 이후 1963년 서울 성동구에 편입돼 ‘석촌동’이 됐고, 강남구와 강동구를 거쳐 1988년 새로 신설된 송파구의 석촌동으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 송파구 석촌동 모습. 볏단을 옮기는 청년 뒤로 돌로 만든 담장이 보인다. [사진 송파구청]

  석촌동이 ‘돌마리’라고 불릴 만큼 돌이 많은 이유는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 번째는 병자호란 때 조선에 침입한 청나라 군사들이 이곳에 돌을 옮겨다 진(陳)터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또 다른 이야기는 석촌동에 돌로 쌓은 백제 초기의 고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후자 쪽일 가능성이 더 높다.

 백제 초기의 고분은 적석총으로 우리말로 ‘돌무지 무덤’이다. 다섯 개의 돌무지가 쌓여 있어 ‘오봉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갑작스러운 침략으로 백제의 한성시대가 끝이 나면서 이곳의 역사도 함께 묻혔다.

 지역 주민들은 이곳 적석총이 2000년 전 백제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혀 있는 중요한 유적인지 몰랐다. 한 때는 백제의 고분인지 알지 못해 ‘말(馬) 무덤’ 이라고 전해지기도 했었다. 사람들은 집을 짓고 땅을 평평하게 하기 위해 무덤을 허물고, 돌들을 가져다가 담장을 쌓았다. 뿐만 아니라 장독대를 만들고 빨래 밑돌로도 사용했다. 또 6·25 전쟁 때는 미군들이 한강 도강작전을 하기 위해 이곳의 돌들을 한강에 쏟아 붓기까지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적석총은 많이 훼손됐고, 원형을 갖추고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지금은 적석총 3기만이 남아있다. 그 중 사적 제 243호로 지정된 3호분은 밑변이 50m, 높이가 4.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다. 중국에 있는 장군총과도 비교할 수 있을 만큼의 규모라 학자들은 백제 초기에 강력한 힘을 가졌던 왕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지난해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근초고왕’은 대부분의 사람이 잊고 지내던 백제의 역사를 재조명하게 된 계기였다. 이 3호분이 백제가 가장 위력을 떨쳤을 당시 근초고왕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석촌동은 남한산성에서 바라보면 황계(黃鷄)가 우는 형상이라고 한다. 닭은 예로부터 잡귀를 물리치는 동물이었다. 붉은 색 역시 귀신을 쫓고 액을 물리치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마을이 잡귀를 물리치는 닭의 형상이고, 액을 물리치는 붉은 색이니 이 마을에는 귀신이나 액은 얼씬도 못했을 것이다. 백제 초기부터 권력자들이 이 부근에 묘를 쓴 이유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석촌동 백제초기 고분군 안에는 수령이 250여 년이 된 회화나무가 있다. 10월 상달에 “한 해 동안 마을을 잘 지켜달라”고 고사를 지내 마을 주민들은 ‘고사나무’라고도 불렀다.

  이렇듯 석촌동은 백제의 권력자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석촌동이 워낙 명당이라 삼천갑자(三千甲子, 18만년)를 산 동방삭(東方朔)이 노닐던 곳이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석촌동에 있는 우리 문화유적이 오래도록 후세에 전해지길 바란다.

김혜경(45)씨는 2010년 송파문화원 박물관대학 수료 후 심화과정을 거쳐 송파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주부박물관대학 수료 후 멘토 교사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전시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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