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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

중앙일보

입력

"유럽의 강세, 미국의 선전, 그리고 아시아의 부진" 으로 요약될 수 있는 올 칸영화제(54회) 현장에서 새삼 확인한 교훈이 있다. 감독의 명성, 국가 이미지, 배급사의 로비, 제작자본의 성격, 심사위원의 성향 등이다. 작품 외적 요인이 작품성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흔히 칸 같은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영화제에 초청받으려면 작품성이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지난 5년간 네차례 칸을 찾으면서 갖게 된 확신이다. "어떻게 이 정도 수준으로 그 어렵다는 경쟁부문에 진출한 걸까" 하는 의문을 품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한결같이 아시아 영화의 부진을 개탄했지만 사실 '칸다하르' (모흐센 마흐말바프.이란) 나 '거기는 지금 몇시□' (차이밍량.대만) , '빨강 다리 밑의 따뜻한 강물' (이마무라 쇼헤이.일본) 세 작품은 수상작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수작 내지 걸작이다.

개인적으로는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너무나 평이한 범작 '아들의 방' (난니 모레티) 을 능가했다고 본다. 이들이 주요 부문 상을 하나도 타지 못한 건 심사위원의 성향에 맞지 않았거나, 혹은 라이벌이 너무 쟁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사막의 달' (아오야마 신지) 과 '디스턴스' (고레-에다 히로카즈) , 대만의 '밀레니엄 맘보' (후샤오시엔) 는 작품성 하나론 도저히 칸 입성이 불가능했을 졸작 혹은 범작임이 분명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 거장인 '비정성시' 의 후샤오시엔은 물론, 아오야마는 지난해 칸 경쟁진출작 '유레카' 가 없었다면, 고레-에다는 '환상의 빛' '사후' 가 없었다면 칸 진출을 꿈조차 꾸지 못했을 정도였다.

이들 세 작품 배후엔 각각 올 칸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배급사 와일드 번치와, 예술영화 전문 배급사인 셀룰로이드 드림스, 역시 예술영화 해외 배급에 일가견이 있는 네덜란드의 포르티시모가 버티고 있었다. 이들 배급사는 막강한 섭외력을 발휘, 물밑 작업을 통해 출품작 선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밀레니엄 맘보' 는 대만 외에 프랑스 자본이 투입됐다. 일찍이 영화의 '새물결' (뉴 웨이브) 을 거쳤던 '영화 선진국' 으로서의 대만의 이미지도 작용했다. 이 같은 컨텍스트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작품성만으로 영화제에서 승부를 건다는 건 이제 거의 승산 없는 게임이다.

과거 우리는 어땠고, 지금은 어떤가.

지난해 '춘향뎐' 이 국내 최초로 칸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던 건 일정한 작품성 외에도, 한국의 대표적 거장으로서 임권택 감독이 그간 쌓아온 작가(Auteur) 로서의 명성, 살아 생전 그 '악명' 높은 팔레 뒤 페스티벌의 붉은 카펫을 밟고야 말겠다는 제작자 이태원 사장의 집념, 그리고 홍상수( '강원도의 힘' ) .이광모( '아름다운 시절' ) .허진호( '8월의 크리스마스' ) 등을 통해 높아진 국가 이미지 등이 결합돼 이뤄진 눈물겨운 쾌거였다.

올해 한국 장편영화 중 단 한편도 칸에 입성하지 못했다는 건 무척 유감스러운 불운이다. 송일곤의 '꽃섬' 이 일정을 맞추지 못해 출품하지 못한 게 못내 안타깝다. '소풍' 으로 칸 단편 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바 있어 그가 칸 진출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었기 때문이다.

월드컵이 개최되는 2002년을 앞둔 요즘은 한국영화의 위상을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우리는 올해 그 호기를 적극 활용하지 못했다.

영화제용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문화로서, 예술로서 한국영화를 세계무대에 알리기 위해선 칸.베니스.베를린 같은 국제 영화제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영화산업의 비약적 발전 덕분일까. 다행히 세계는 현재 한국 영화를 기다리고 있고, 찾고 있다. 올 칸 마켓에서도 우리 영화를 보는 눈이 상당히 달라졌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이미 언급했듯 국제영화제 진출은 좀더 약게, 현명하게 접근해야 한다. 국제영화제 수상은 이제 한국(영화) 인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찬일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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