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지식] 공자 연봉 ‘좁쌀 6만’은 280명 1년 양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
리카이저우 지음
박영인 옮김, 에쎄
408쪽, 1만8000원

먹어야 산다. 누구나 그렇다. 이는 노동과, 나아가 돈과 연결된다. 자급자족 사회가 아니라면 당연하다. 역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이 엄연한 현실을 잊는다. 특히 위대한 사상가, 유명한 문인, 용맹한 장군의 행적을 좇으면서 ‘생활’을 빠뜨린다. 그들이라고 심오한 사유만 하거나 시를 짓거나 전쟁만 한 건 아니다. 먹고 살아야 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사상에 압도되고, 작품에 홀리고, 전과에 눈이 부신 탓이다. 하지만 이건 허울만 보는 격이다. 한 인간으로서 위인을 봐야 그 온전한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 할 수 있다.

 중국의 30대 칼럼니스트가 쓴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공자에서 장제스(蔣介石)까지 중국의 역사적 인물 14인의 경제생활을 파헤쳐 이들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공자의 살림 형편은 어땠을까. 한 번도 갖지 않았던 의문이다. 노나라 관리였던 숙량흘의 서자이자 차남이었던 공자는 변변한 유산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지은이에 따르면 곤궁하지 않았다. 덕치주의를 설파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며 때로는 식량이 떨어지는 등 고생했다는 기존 인식과는 좀 다르다.

 기원전 497년 공자는 위나라로 건너가 영공(靈公)의 부탁으로 관학에서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다. 이 때 연봉이 ‘좁쌀 6만’이란 기록이 있다. 이 연봉을 현대식으로 계량하니 90톤이다. 280명이 일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공자 가족이 4명이었으니 온 가족이 몇 십 년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돈으로 얼마인지 가늠이 어렵지만 막대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부동산도 상당했다. 북위 때 나온 『수경주(水經注)』에 공자의 집에 관한 기록이 실렸다. 방은 3칸이었다지만 대지가 100묘, 현재 단위로 2만여㎡다. 이 정도면 집이 아니라 농장이다. 당시 중국의 주택 개념은 경작지를 포함한 가족농장형이었음을 감안해도 일반가구가 5묘였던 점에 비춰 보면 꽤나 호화주택이었던 셈이다.

 공자의 살림살이만 넉넉했던 게 아니다. 그의 적통을 이은 맹자는 더 풍요로웠다. 맹자가 제나라의 경(卿)으로 잘 나갈 때 연봉이 좁쌀 10만 종이었다. 현대 계량법으로 1만5000톤이다. 공자 연봉의 100배가 넘었다. 뿐만 아니다. 맹자 역시 벼슬살이를 오래하지 않았는데 제나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를 흠모한 송나라와 설나라 임금이 각각 황금 70일(鎰), 50일을 선물로 보냈다. 이게 또 귀향 여비치곤 어마어마하다. 미터법으로는 36㎏이나 되니 말이다. 지은이는 이 정도면 귀향 여비가 아니라 호화판 세계일주 여행이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책은 물론 위인들의 ‘뒷담화’를 하자는 게 아니다. 제대로 보자는 것이다. 벼슬을 버리고 은둔의 삶을 산 시인 도연명은 가난에 허덕였으며, 판관 포청천이 청백리의 표본이 된 데는 엄청나게 많은 월급이 한몫 했다는 사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돈 버느라 골몰하는 이는 ‘군자’가 아니고, 인격이 고매한 사람은 경제와 동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전통적 가치관은 유가(儒家)의 가르침을 오해한 역사적 왜곡이라 주장한다. 유가는 물질을 결코 경시하지 않았으며 단지 이롭지 못한 방법으로 돈 버는 것을 경계했다고 지적한다.

 이쯤 되면 책의 의도에 의구심이 생긴다. 자본주의 세례를 받은 현대 중국의 경제우선주의를 변호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서다. 원제도 ‘군자는 재물을 사랑한다(君子愛財)’여서 그런 혐의가 더욱 짙다. 그럼에도 책에는 재미와 의미가 함께 담겼다. 기존의 고전해설서나 역사책에선 만날 수 없던 사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족. 책 제목은 조금 엇나갔다. 공자 맹자 등 ‘위인’만 다룬 게 아니라 삼국지의 조조, 중국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명나라 세종 때 재상 엄숭이나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도 포함됐기 때문이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