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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알렉산더도 부러워했던 디오게네스의 여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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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폭염과 태풍이 지나갑니다. 곧 산과 강이 가을빛으로 물들어갈 겁니다.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함께하는 ‘이 달의 책’ 9월 주제는 ‘가을 바람, 그리고 나’입니다. 여름 더위에 지쳤던 우리들을 추스르는 세 권의 책을 골랐습니다. 몸과 마음, 모두 살찌게 할 가을의 양식 같은 책입니다.

직언(直言):죽은 철학자들의 살아 있는 쓴소리
윌리엄 B 어빈 지음
박여진 옮김, 토네이도
302쪽, 1만4000원

삶과 행복에 관한 레시피로 꾸며진 『직언』은 이젠 ‘맛없는 철학책’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굿’(good, 좋음)의 3박자를 두루 갖췄다. 진정한 굿이란 재미·감동·쓸모 3요소를 갖춰야 한다는 게 그의 정의인데, 이 책이 바로 그렇다.

 저자가 노린 건 훈계나 강의가 아니다. “책을 쓰면서 이 질문을 염두에 뒀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21세기 독자를 위해 좋은 삶, 바람직한 삶을 쓴다면? 왜 하필 ‘꼰대들의 훈계’ 같은 스토아 철학인가라고 묻겠지만….”(머리말) 그래서 『직언』은 양서류 과(科)이다. 정통철학서이되 자기계발서로 아무런 문제 없다.

[일러스트=강일구]

 구성부터 그렇다. ‘왜 하필 스토아인가?’(1부)의 뒤 부분은 꼭 실용서이다. ‘영혼의 휴식처를 발견하라’(2부) ‘위대한 고요로 존재하라’(3부) ‘삶의 기본에 집중하라’(4부) 누가 이걸 스토아 철학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이자, 현대적 재해석이라고 믿을까. 그런데 스토아 철학이 뭐지.

 우선 거리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이 철학에서 가장 유명하다. 지금으로 치면 노숙자 신분으로 무소유의 삶을 즐기던 그를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왔다. 삶의 지혜를 구하러 온 것인데, 이때 “거기 햇볕을 가리니 제발 비켜주오”라는 말로 최고권력자를 돌려세웠다. 젊은 대왕의 대꾸도 은근히 멋졌다.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를 꿈꿨을 텐데….“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가 등장 전 옛 시대 사람의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았던 ‘삶의 철학’이다. 『명상록』으로 유명한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최후의 스토아 철학자로 꼽힌다. 그 전에 노예 출신의 에픽테토스,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등도 유명한데, 스토아 철학은 요즘 다시 뜨고 있다.

 데카르트·칸트 등 근대 철학과 달리 ‘삶의 기술’로 훌륭하다는 재발견 때문이다. 인식론 등에 코 박은 근대 철학이 머리통만 큰 가분수라면, 삶 전체를 커버하는 스토아 철학은 튼튼한 몸통과 팔 다리를 가졌다. 현대인이 끌리는 건 자연스레 스토아 철학 쪽이 아닐까.

 스토아 철학은 행복·명예부터 노년·죽음까지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 했다. ‘지금 여기(here & now)에 집중하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도 이 철학의 영향이다. 스토아 철학은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고 보니까. 당연히 지금의 삶을 껴안으라는 메시지이다.

 분노? 그건 “나를 너무 사소한 것에 소비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럼 이 수수께끼 같은 삶이란 대체 무엇일까. 스토아 철학은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즉 삶이란 결코 만만치 않은 격투기로 비유된다. 이때 거의 피할 수 없이 끼어드는 게 고난인데, 이걸 삶의 축복으로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 저자 어빈 교수(미 라이트 주립대)는 부정적 상황 설정을 습관화하라고 말한다. 그래야 슬픔·불안·걱정 등의 순간에 내면의 단단함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부정적 상황 설정은 간단하다.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는데,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아무리 나쁜 상황이라 해도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당신의 삶이 아무리 고달프다 해도 누군가는 당신 삶을 살고 싶어할지 모른다. 하반신 마비로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은 아마도 전신마비 환자가 꿈꾸는 삶일 수 있다.”(283쪽)

 그래야 최악의 상태에서도 유머를 발휘할 수 있다. 좋다. 그럼에도 왜 우리 삶은 항상 흔들릴까. 인간은 애초에 만족을 모르는 존재이다. 원하던 것을 얻고도 이내 지루해 하며, 더 큰 욕망을 꿈 꾼다. 원인은 쾌락 설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만족할 수 없는 굴렁쇠’를 끊임없이 굴리는 게 인간인 셈이다.

 그리고 굴렁쇠를 굴리는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 이른바 평정심이다. 그런 요소가 불교와도 닮았다. 사실 『직언』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쓴소리는 흔들리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삶의 원칙과 기술이 필요하다는데 모아진다. 스토아 철학에 영향을 받은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그러했다. 그래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아 월든 호숫가를 찾았다.

 멋진 책 『직언』을 또 하나의 스토아 철학책인 『철학을 권하다: 삶을 사랑하는 기술』(줄스 에반스 지음)과 함께 읽길 권한다. 부스러기 철학사 정보를 반복하지 않은 점, 우리 시대 삶의 이야기로 바꿔준 점이 똑 같다. 스토아 철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거품이 서서히 빠지면서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는 ‘철학의 신(新)서부’가 맞긴 맞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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