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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세상보기] 과학, 기술, 그리고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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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나침반.인쇄술 등과 함께 인류 최고 발명품의 하나로 꼽히는 화약은 중국에서 처음 발명됐다.

화약을 만드는 방법이나 포탄을 적지에 떨어뜨리는 기술을 축적된 경험에 의존해야만 했던 중세까지만 해도 독일.영국 등 북유럽의 문명은 중국이나 이슬람세계에 비하면 야만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근세에 들어서면서 패권은 유럽으로 넘어갔다. 동양의 경험적 기술은 한계에 부닥친 데 비해, 유럽이 합리성에 기초를 둔 과학적 방법을 발전시키면서 기술에도 격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말해서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뉴턴 역학을 이용해 탄도를 계산해서 포탄을 적진에 정확히 떨어뜨리는 소프트웨어를 가지게 된 유럽은 전쟁에서 쉽사리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럽은 화학을 근대과학으로 발전시켰으나 동양의 화학은 연금술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베이징(北京) 의 55일'' 이라는 영화에서 보았듯이 결국 중국은 영국에 무릎을 꿇게 된다.

동양의 기술이 화약이라는 하드웨어를 발명하는 데 그쳤다면, 서구는 자연과학이라는 소프트웨어를 발전시켜 보다 큰 힘을 발휘한 것이다.

화약의 발명도 그렇지만 그에 앞서서 청동기.철기문명이 열린 것도 다 경험을 잘 살려 기술화한 인류의 지혜 덕분이다. 효소가 알려지기 수천년 전부터 인간은 맥주와 포도주를 담가 마셨다.

이처럼 옛날의 발명은 대부분 원리의 이해에 앞서서 경험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적 원리를 모르고 새로운 기술을 창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한편 맥스웰 방정식과 무선통신, 채드윅의 중성자와 핵에너지, 양자역학과 반도체나 레이저 등 순수한 과학적 발견이 예상치 못한 기술을 창출한 사례는 끝이 없을 정도다.

가장 좋은 사례는 1953년 무명의 두 청년 웟슨과 크릭에 의한 DNA 이중나선구조의 발견이라 하겠다.

그를 계기로 전통적인 생물학이 분자단위에서 생명현상을 규명하는 분자생물학으로 도약했을 뿐 아니라, 이중나선의 발견은 21세기에 인류복지에 가장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생물공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기초과학은 응용과학에 기반을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시대의 문화를 규정하기도 한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얼마나 큰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왔는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칼 세이건이 주도한 외계생명체탐사 프로젝트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했던가? 허블망원경으로 본 우주를 바라보며 우리는 인간이 수천년 동안 던져왔던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에 비로소 과학적인 답을 내놓게 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를 알게 되면 우리의 생각과 언어의 색채가 바뀐다. 일상에서 편한 것과 의미 있는 것을 구분하지 않을 수 없다.

휴대폰을 귀에 달고 다니면서도 주고받는 말의 내용이 허망하다면 과연 편리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콘텐츠를 향상시키는 데 있어서 인문학.사회과학의 기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서울대 인문대.사회대.자연대 교수들이 기초학문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국립대학이 실용적인 응용과학이나 공학에서 기업체가 스스로 감당하기 벅찬 부분을 담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당장 이익을 내야 하는 기업에서 손을 대지 않는, 그러면서도 미래기술의 원천이 될 기초과학을 육성하는 것은 그보다 더 중요한 국립대학의 사명이다.

기초학문은 응용학문의 기반을 제공할 뿐 아니라 삶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콘텐츠를 제공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MIT의 노버트 위너 교수는 "기초과학은 어린 나무와 같아서 가끔 뿌리가 잘 자라고 있나 살펴보기 위해 나무를 뽑아보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 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그 동안 기초과학에서 선진국에 많은 빚을 져왔다.

이제 겨우 뿌리를 내려가는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이 하루 빨리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충분한 물과 비료를 주면서 끈기를 가지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김민숙 서울대 교수 ·분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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