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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태풍 최전선 … ‘대한민국 핫코너’ 가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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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전남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항에 설치된 철구조물이 태풍 볼라벤이 지나간 뒤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인양기가 부착된 이 구조물은 선박들을 바다에서 뭍으로 끌어올리는 기능을 한다. [사진 정종홍 가거도파출소장]

전남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 목포에서 쾌속선을 타고 4시간을 달려야 닿는 한반도의 서남쪽 끝이다. 이곳은 ‘대한민국의 핫코너’라 불린다. 야구에서 강한 타구가 많이 날아가는 3루 구간처럼 태풍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이곳 주민 533명은 34년째 태풍과 치열하게 싸워 왔다. 이번 ‘볼라벤’ 태풍도 가거도를 비켜가지 않았다.

 볼라벤이 맹위를 떨칠 당시 암흑 속에서 불안에 떨던 주민들은 밤이 새자 더욱 기막힌 광경을 목격했다. 30여 년이 넘도록 쌓아온 480m 길이의 마을 앞 방파제가 파손된 것이다. 무너지고 또 쌓으면 무너져도 좌절하지 않고 쌓아온 방파제가 또다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번 태풍으로 가거도는 29일까지 사흘째 완전 고립됐다. 해상 교통편이 끊겨 발이 묶인 것은 물론 유·무선 전화와 인터넷이 모두 끊겼다. 볼라벤이 북상하던 28일 0시7분 통신탑 안테나가 강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장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정확한 피해 상황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외부로 피해 소식을 알린 것은 현지 치안을 맡고 있는 정종홍(50) 가거도 파출소장의 블로그였다. 태풍에 대비해 주민을 대피시키느라 동분서주하던 그는 29일 오전 3시42분 긴박한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유·무선 통신이 끊긴 지 27시간여 만에 잠시 잡힌 인터넷 신호를 이용해서였다. 그 이후 또다시 인터넷은 불통 상태다. 블로그에 올라온 정 소장의 글과 사진은 아수라장으로 변한 섬 안팎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최소 3개월간 주민들의 어업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썼다. 태풍 전 육지로 올려놓은 선박 중 6척도 파손됐다. 마을 곳곳의 주택과 폐기물소각장 등도 지붕과 벽이 파손됐다.

 하지만 주민들은 복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가거도 주민 고승호씨는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던 방파제가 또 무너졌지만 주민들과 함께 태풍 피해를 말끔히 복구하겠다”고 말했다. 고씨는 최근 목포로 나왔다가 태풍 때문에 가거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신안군 김영구 흑산면장은 “가거도 주민들은 30여 년에 걸친 태풍 피해에 아랑곳 않고 섬을 굳건히 지켜왔다”며 “주민들이 다시 삶의 터전을 일굴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가거도 방파제는 1978년 착공됐다. 하지만 주민들의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셀마’(87년), ‘프라피룬’(2000년), ‘라마순’(2002년) 등의 태풍으로 번번이 공사 현장이 ‘쑥대밭’이 되는 바람에 완공까지 30년이 걸렸다. 하지만 그마저 지난해 태풍 무이파 등에 의해 무너져내렸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마을 뒤편 독실산으로 피하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

 28일 새벽 가거도를 강타한 볼라벤은 지난달 겨우 복구 공사가 끝난 방파제 200m를 또다시 집어삼켰다. 지난해 태풍 ‘무이파’ 이후 보강한 64t짜리 테트라포드(tetrapod·사발이) 800여 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해어업관리단은 올해로 예정된 ‘수퍼 방파제’ 착공을 앞두고 지난해 12월부터 7개월간 응급복구 공사를 했지만 이 역시 다 날아가버렸다. 김황식 총리가 현지를 방문해 약속한 수퍼 방파제는 1000여억원을 들여 1만700t짜리 초대형 케이슨(caisson·콘크리트 박스)을 투입해 마치 성벽과 같은 제방을 쌓겠다는 계획이다. 전충남 서해어업관리단 어항건설과장은 “올해 말에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해 2018년에는 100년 빈도의 파도에도 견딜 수 있는 방파제를 축조하겠다”고 말했다.

신안=최경호 기자

◆핫코너(Hot Corner)=강한 타구가 많이 날아가는 3루 구간을 말하는 야구용어다. 전남 신안군 가거도 부근은 태풍이 강하게 지나가는 곳이라 ‘핫코너’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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