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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인생·인품 보고 30년간 사 모은 작품들 이제 함께 보고 싶네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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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호 22면

서울미술관을 설립한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사진 왼쪽)이 부인인 서유진 석파문화원 원장, 이주헌 서울미술관 관장과 함께 미술관 위에 있는 석파정 한옥 앞에 모였다.

장면1. 1983년 서울 명동. 액자집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던 스물일곱 제약회사 영업사원의 눈에 이상한 황소 그림이 들어왔다. 뼈다귀만 남은 것 같은, 하지만 보면 볼수록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못 그린’ 그림이었다. 9000원밖에 없던 그는 만원을 부르는 주인에게 밥값과 차비를 뺀 7000원만 주고 작품을 넘겨받았다. 문을 나서는 그에게 주인이 말했다. “그거 그림 아니고 사진이에요.” 그림인지 사진인지, 작가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그는 왠지 뿌듯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서울미술관’ 여는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

장면2. 2010년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 경매에서 이중섭의 유화 ‘황소’(1953)가 35억6000만원에 낙찰됐다. 박수근의 ‘빨래터’가 가진 기록(45억2000만원)을 깰 것인지 초미의 관심을 모았던 작품이었다. 국내 경매가 2위를 기록한 이 작품은 누군가의 집으로 조용히 옮겨졌다.

장면3. 2006년 서울 부암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쓰였던 ‘석파정(石坡亭)’이 포함된 대지가 경매에서 다시 유찰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사고 싶다”는 생각에 입찰에 나섰지만 결과는 실패. 그보다 조금 더 써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장면4. 2007년 다시 서울 부암동. ‘석파정’ 주인이 그를 찾아왔다. “이 땅을 살 생각이 없으십니까?” 대로변에 있어 사옥을 지으면 안성맞춤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지을 수 없었다. 석파정은 서울시 유형문화재(제26호)였다. 지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미술관뿐이었다. 30여 년간 모아온 작품이 100여 점 정도 있었다. “그래, 미술관을 짓자. 그리고 이 그림들을 이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보도록 하자.”

하지만 돌고개(石坡)란 이름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건물을 지으려면 단단한 돌덩어리를 부숴야 했다. 무소음·무진동 다이너마이트는 오후 1시부터 2시까지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나마 청와대, 안기부, 종로구청 등 각계의 감시 속에 걸핏하면 중단됐다. 29일 서울 부암동에 개관하는 서울미술관에는 유니온약품 안병광(56) 회장의 드라마틱한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학 졸업 후 친구들과 의류 오퍼상을 차렸지만 집도 사채업자에게 넘기고 월세로 옮겨야 했다. 5년간의 제약회사 영업사원 경험을 바탕으로 차린 회사도 자리 잡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긍정의 힘을 믿었다.

“약을 팔러 다니다 보니 병원에 웃고 들어오는 환자는 없더라고요. 그들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이들에게 휴식과 감성을 주고 싶다고요. 미술관을 만들게 된 것도 그런 생각을 계속 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어떤 그림을 주로 사느냐고 묻자 그는 “우선 작가의 인생과 인품을 보고, 다음으로 재산 가치를 본다”고 했다. 이중섭 그림이 20여 점으로 가장 많고 박수근, 천경자, 김기창, 오치균 등 한국 근·현대 작가들 중심으로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을 짓겠다고 하자 주위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세계 어느 나라의 미술관도 흑자를 내는 곳은 없다는 이유였다.
“전 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하기 나름 아닌가. 흑자가 나는 미술관도 한번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서울미술관을 서울을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관장은 갤러리 대표와 미술 평론가 등으로 일해 온 이주헌(51)씨. 그는 개관전으로 ‘둥섭, 르네상스로 가세!-이중섭과 르네상스 다방의 화가들’을 기획했다. ‘둥섭’은 ‘중섭’의 서북 방언. 52년 12월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동인전을 열었던 이중섭ㆍ한묵ㆍ박고석ㆍ이봉상ㆍ손응성과 후배 작가 정규 등 근대 거장 6명을 기리는 전시다. 진품 ‘황소’를 비롯한 이중섭 자화상 및 드로잉 34점을 비롯한 근대회화 73점을 볼 수 있다.

전시장 1층을 지나 3층까지 올라간 관람객들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안복을 누리게 된다. 북악산과 인왕산 자락의 수려한 풍광과 그 속에 자리한 석파정의 고즈넉한 한옥 4개 동을 한눈에 즐기는 호사다. 입장료는 성인 9000원. 문의 02-39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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