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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수학 공식처럼 극도로 집약된 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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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함기석 시인은 두 아이를 키우면서 동시도 쓰기 시작했다. “동시 앞에선 마음이 밝아지는데 시는 그 반대다”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함기석(46)은 한양대 수학과를 졸업했다. 시인이 수학을 전공한 것은 요즘 같은 통섭의 시대에 특장점이 될 수 있지만 문단에서는 비주류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의 시에는 ∞(무한대) 같은 수학기호가 등장하고, 도형이 곧 시어가 되며, 시 전체에 기하학 구조를 차용하기도 한다. ‘획기적이다’ ‘난해하다’ 독자들의 평도 양극단을 오간다.

 시인이 대표작으로 꼽은 ‘국립낱말과학수사원’은 지난 1년 동안 발표한 작품 중 가장 ‘함기석스럽다’. y라는 부검의가 있다. y는 <있다>와 <없다>, <보다>와 <쓰다>의 실체를 알고 싶어 부검을 시작한다. 복부를 가르고 창자를 만지지만 실체에 접근하지 못한 y는 검은 옷을 입은 자에게 납치돼 살해된다. 청주에서 올라온 시인에게 물었다.

 -이 시는 어떻게 쓰였나.

 “y는 제 자신일 수도 있고, 독자일 수도 있어요. <있다>와 <없다>는 존재의 유무이고 <보다>와 <쓰다>는 감각과 언어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부검)하려 들지만 결국 할 수 없어요. 논리와 이성, 과학의 완벽함을 부정하는 것이죠.”

 -낱말이 생물처럼 연을 옮겨 다닌다.

 “언어란 무엇이고, 어떻게 발생·소멸하는지 관심이 많습니다. 이 시는 현실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시어가 1연에서 2연으로 움직이고, 걷고, 죽는 ‘시적 현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시는 여러차례 퇴고를 거쳤다. 1연부터 6연까지 하나의 건물을 짓듯 촘촘하게 기하학의 구조를 입혔다. 시인은 “수학 공식은 극도로 추상화되고 집약된 시다. 철학자 중 많은 이가 수학자였던 것처럼 시와 수학은 닮은 점이 많다”고 했다.

 암매장, 토막 난 시체, 주검, 납치 등 시에서 잔혹함이 묻어나는 것도 특징이다. 하지만 시인은 의도적으로 그로테스크함을 추구하진 않는다고 했다. 폭력과 강간, 살인이 난무하는 우리 현실이 그보다 더 잔혹하기 때문에 이를 반영할 뿐이다.

  “저는 시가 치유의 역할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속한 사회의 폐단과 은폐된 모습을 보여주고, 인식론적인 충격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난해하다는 평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시인은 선배들이 썼던 시를 답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메시지를 전달할 때 가장 적확한 표현 방식을 고민합니다. 형식은 껍데기가 아니에요. 그런 도전 과정에서 시가 난해해질 수도 있는데, 메시지의 진정성이 있다면 난해함은 부차적인 문제가 아닐까요.”

그의 시는 앞으로도 논쟁적일 것이다. 논쟁적이라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뜻이다. 그의 파닥거리는 시어처럼 말이다.

◆함기석=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눈높이아동문학상 수상(2006), 박인환문학상(2009) 수상. 시집 『뽈랑공원』 『착란의 돌』 『오렌지 기하학』 등.

국립낱말과학수사원

부검될 변사체 <없다>가 보관된 곳은 1연이다
1연은 지하 4층에 있다
빛과 음이 차단된 탈의실에서 부검의 y는 흰 가운으로 갈아입고
황급히 2연으로 이동 중이다
2연은 1연에서 엘리베이터로 1분 거리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2연이다 9층 복도를 따라 환자복을 입은 낱말들이
휠체어를 타고 지나다닌다 간호사 둘이
두개골이 함몰된 또 다른 변사체 <있다>를 실은 침대를 밀며
복도 끝의 5연으로 뛰어간다

y는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3연을 걷는다
사각문을 열고 들어가니 잔디가 깔린 튤립 정원이 나온다
공중으로 알파벳 새들이 날고
목련나무 밑의 벤치에서 외국 검시관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사체의 인적사항, 사건명, 사건번호, 사건개요와 일시 등
의뢰서에 적힌 세부사항들을 확인하는 사이

법의학과 회전문이 반시계방향으로 돌기 시작한다
도대체 오늘의 부검대상은 누구야? y는 투덜거리며 침을 뱉고
범죄분석실 좌측의 대리석으로 지은 4연으로 들어간다
바닥에 어제 부검한 <보다>의 핏덩이 혈흔이 엉켜 있고

<쓰다>의 손가락 하나가 떨어져 있다

y는 손가락을 집어 비닐에 넣고 5연으로 이동한다
금속침대에 <있다>와 <없다>가 부부처럼 나란히 누워 있다
y는 매스로 <있다>의 복부를 가른다 물컹거리는 창자를 만지는데
커튼 뒤에서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가위를 들고 나온다
y의 옷을 갈가리 찢고 질식시켜 6연으로 끌고간다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는 과학수사원 뒤편의 숲이다
y는 계곡에 버려진 채 누구도 발음할 수 없는 낱말이 되어간다
살을 파먹는 모음벌레 o와 u가 들러붙어 즙을 빤다 며칠 후
한 등산객에 의해 사체는 우연히 발견된다
오늘 부검될 변사체 가 보관된 곳은 1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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