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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영화는 전부 내 교과서 … 외울 만큼 돌려보며 기법 익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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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넌센스 미션’은 성적 때문에 자살하려는 고등학생 형준과 그의 자살을 막으려는 친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경기고 3학년 윤호준군이 감독을 맡았다. 이 영화는 23일부터 29일까지 열리는 ‘제 14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경쟁부문 본선에 진출했다. 214편의 국내 출품작 중 14편 안에 든 것이다.

글=전민희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10년 뒤에는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영화를 만들겠습니다. 제 영화 기대해주세요.” 윤호준군이 영화촬영에 사용하는 6㎜ 카메라를 들고 포부를 밝히고 있다.

윤군이 영화감독에 대한 꿈을 꾼 건 일곱 살이 되던 해, 로버트 듀발 주연의 영화 ‘딥임팩트’를 본 후부터다. 지구와 혜성의 충돌을 저지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그린 작품이다. 스크린에선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건물이 무너지고, 도시 전체가 파괴됐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죠. 영화에서는 사람이 가진 모든 상상력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후 집에 있던 캠코더는 그의 장남감이 됐다. 가족여행이나 외식을 갈 때면 캠코더를 챙겼다. 여행·소풍·모임 등 가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캠코더에 담았다. “네모난 뷰파인더에 가족들의 추억을 담는 작업이 즐거웠습니다. 내용 전개나 카메라 구도는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찍는 것’에 전념했죠.” 하지만 중학교에 진학한 뒤 자신이 초등학교 시절 촬영한 영상을 본 윤군은 지루함을 느꼈다. 가족여행을 소재로 한 영상은 장소만 바뀔 뿐 계속 같은 내용이었다. 윤군은 가족영상을 좀 더 흥미로운 내용으로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편집’이었다. “5시간 동안 촬영한 것을 5분 분량의 짤막한 영상으로 편집을 했어요.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을 잘라붙이고, 현장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효과음이나 음악도 삽입했죠.” 편집과정을 거쳐 다시 만들어진 영상은 내용전개가 쉽고 재미있었다.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가족의 일상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 만든 가족 영상만 100편이 넘는다.

 그가 영화감독이란 꿈을 구체화한 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 “당시 이 영화는 대중들에게 잊혀져 가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수천 명의 경찰과 법조인, 정치인이 하지 못했을 일을 단 한 편의 영화가 한 셈이죠. 영화가 가진 파괴력을 실감할 수 있었어요. ‘바로 이거다’ 싶었죠.”

 영화감독이 되자고 결심한 윤군에게 영화는 살아있는 교과서나 마찬가지였다. 시험기간에 교과서를 달달 외우듯 그는 유명 영화들의 내용 전개과정이나 카메라 기법을 통째로 암기했다. ‘살인의 추억’이나 ‘올드보이’와 같은 영화는 100번도 넘게 봤다. 영화를 복습(?)할 때마다 새로운 분야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영화의 이야기 전개방식을 이해했고, 배우들의 연기를 익혔다. 자연스럽게 촬영기법에 대한 것까지 알 수 있었다. 배우들의 대사는 물론, 영화에서 활용된 배경과 의상, 소품까지 줄줄이 외울 정도다.

 지난해 5월 ‘내게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질이 있을까’를 궁금해 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동안 윤군이 만들어온 영상을 본 친구 박용준(경기고 3)군이 “함께 ‘2011년 서울환경작품공모전’ UCC 부문에 나가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들은 ‘환경을 지키자’는 내용의 5분 분량 영상을 만들었다.

 “UCC에 고등학생이 등교하면서 화분을 들고 지하철을 타는 장면이 나와요. 화분은 환경을, 지하철은 경제성장을 의미합니다. 경제성장과 환경보호라는 대비된 상황을 활용해 ‘제대로 된 환경보호를 하려면 시민의식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부분을 강조했죠.”

 첫 도전에서 3위의 성적을 거둔 윤군은 ‘영화감독’이란 꿈에 확신을 가졌다. 지난 겨울방학에는 ‘제2회 올레 스마트폰영화제’에 도전했다. 자신이 존경하는 이준익·박찬욱 감독이 심사위원을 맡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당시 사회 이슈였던 ‘학교 폭력’을 주제로 했다. 학교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후세계에서 다시 만나 서로 소통하는 내용이었다. 600~700여 개의 출품작 중 본선 진출작은 12편. 그 중 청소년 작품은 윤군이 만든 ‘원증회고(怨憎會苦)’가 유일했다. “주위에선 ‘잘했다’고 했지만, 제겐 수상실패의 한(恨)이 남았어요. 몇 날 며칠 동안 실패원인을 분석했죠. ‘주제가 너무 무거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넌센스 미션’을 가볍고 재미있는 내용으로 구성한 이유다. “‘시험을 봤는데 컴퓨터 작동오류로 인해 전 과목이 100점이 나온다’는 상상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잖아요.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상상 위에 성적비관과 자살, 우정이란 소재를 섞어 보는 이들의 공감대를 이끌어 내려고 했습니다.” 영화는 주인공 형준의 친구들이 답안지를 없애버리는 작전을 성공시키면서 우스꽝스러운 내용으로 전개되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경쟁에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패는 누구나 한 번쯤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들이 마음먹고 도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게 제가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자신의 포부를 영화에 담은 셈이다.

 “제가 만드는 모든 영화가 성공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실패를 딛고 관객들이 원하는 영화가 무엇인지를 알아가고, 그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제 영화를 통해 사회가 변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Filmography

원증회고

‘제2회 올레 스마트폰영화제’ 본선 진출 작품. ‘학교 폭력’을 주제로 만들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후세계에서 만나 서로 소통하는 내용이다.




넌센스 미션

‘제14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본선 진출 작품. 214편 중 14편에 뽑혔다. 성적 때문에 자살하려는 주인공과 그를 도우려는 친구들의 모습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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