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 덫 벗나 싶자 일자리 끊겨 ‘파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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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09년, 건설경기가 얼어붙더니 일감이 끊겼다. 석 달 동안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네 식구는 전세를 빼 월 40만원의 사글세로 옮겼다. 전세금 7000만원을 생활비로 썼다. 그마저 바닥난 2010년, 송모(39)씨는 사채를 빌렸다. 그에게 빚을 내주겠다는 금융회사는 없었다. 독촉전화에 숨이 찰 때쯤 햇살론 출시 소식을 들었다. 건설노동자 송씨는 2010년 7월 그렇게 전북 한 신협 창구의 첫 햇살론 대출자가 됐다.

 2년이 지난 지금, 송씨는 아직도 빚의 늪에 빠져 있다. 그가 빌린 햇살론 400만원은 사채 갚기도 빠듯했다. 생활비는 여전히 부족했다. 일거리는 갈수록 줄고, 월급은 더 뜨문뜨문 나왔다. 석 달 전 그는 다니던 건설회사를 퇴사했다. 지금까지 다시 쌓인 사채가 800만원, 그나마 최근 ‘바꿔드림론’으로 연 30%대 금리를 10%대로 낮춘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송씨는 “서민금융 덕에 겨우 사채를 막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애들이 둘 다 어린데 고기나 과일을 못 사 줘 가슴 아프다”며 “얼른 일거리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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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도 끝도 일자리였다. 본지가 추적한 햇살론 1호 대출자 56명 중 연체자는 13명. 이 중 10명이 실직이나 일거리 부족으로 돈을 제때 못 갚고 있었다. 사업이 부진하거나 아예 문을 닫아 빚을 갚지 못한다는 자영업자도 둘이었다. 가계 부채의 수렁이 결국 일자리 감소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본지는 대출 지점을 통해 햇살론 연체자 13명과 연락을 시도했다. 이 중 3명만이 “취재에 응하겠다”고 답했다. 이 셋 중 둘은 햇살론 외에도 사채나 카드 빚을 지고 있었다. 이들은 햇살론을 사실상 ‘사채 돌려막기’용으로 썼다.

 인천 한 농협 지점의 햇살론 1호 대출자 오모(43)씨도 그랬다. 택시기사이던 그는 허리 통증으로 운전대를 놓는 날이 늘며 카드론을 쓰기 시작했다. 2년 전 햇살론 1000만원을 빌려 카드론을 갚을 때만 해도 “더 이상 고금리 빚은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택시 수입이 줄어 운전면허학원 강사로 취직한 지 8개월. 그에겐 다시 400만원 정도의 카드론이 생겼다. 그는 “비수기 월급은 150만원도 안 돼 생활하기 빠듯하다”며 “그나마 수입이 좀 생길 땐 햇살론 원리금 갚고 카드론 이자 내느라 저축은 꿈도 못 꾼다”고 말했다.

서울 한 신협 담당자는 “햇살론 신청자 대부분이 수천만원 정도의 사채를 지고 있다”며 “그런 상황에선 햇살론 수백만원을 받아가 봐야 사채 이자 돌려막기에 급급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연체자들 모두 경기침체의 타격을 비켜가지 못했다. 경기도 한 농협의 햇살론 1호 대출자 유모(36)씨. 컴퓨터 학원강사인 그는 지난해 여름부터 부업을 했다. 새벽에 인터넷 홈페이지 관리 일을 한다. 그는 “경기가 가라앉으면 가계가 컴퓨터학원 같은 걸 제일 먼저 줄이는 듯하다”며 “수입이 갈수록 줄어 생활비로 쓰려고 햇살론을 빌렸다”고 말했다. 그는 햇살론 대출금액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유씨는 “퍼주기 식으로 자꾸 빌려 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햇살론 한도는 너무 적은 것 같다”며 “무상교육이라 해도 어린이집에 내는 자기부담금이 월 34만원이나 된다. 임대아파트 월세와 관리비도 한 달에 30만원이 넘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들 외에도 사무실 경비 박모(50)씨는 경기도 한 저축은행에서 햇살론을 빌렸지만 실직으로 파산신청을 했다. 젊은 나이에 식당을 열며 대전 한 농협에서 햇살론을 빌렸던 최모(28)씨는 결국 폐업했다.

 전문가들은 벼랑 끝에 놓인 서민을 햇살론 등 서민금융만으로 구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햇살론은 빚을 갚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대출을 해 주는 금융의 기본을 벗어난 채 운영되고 있다”며 “빚 갚을 능력이 없어 사회복지 차원의 도움을 줘야 하는 서민들에게 (햇살론 등으로) 추가 빚을 지게 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도 “소득이 없는 이에게 당장 급전만 융통해 주는 것은 더 큰 빚의 고리로 끌어들이는 행위”라며 “소득을 늘릴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드는 게 진짜 햇살정책”이라고 말했다. 임미진·

위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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