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이렇게 해서 '더 나쁜 인간'이 되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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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좀더정확히는 기록을 남긴 자의 기록이다. 설사 패배자라 해도 그가 기록을 남겼고 또그것이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면 승리자에 의한 일방적인 매도는 불가능하다.

우리 역사상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보아 가장 '극악무도한 인간'의 하나로 꼽힐만한 궁예는 분명 기록을 남겼을 터이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때문에 우리는 서기 918년 군사 쿠데타로 궁예를 축출한 왕건 혹은 그가 개창한 고려 왕조가 남긴 기록만으로 궁예를 볼 수밖에 없다.

궁예에 관한 기록으로는 고려 인종 23년(1145)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조선 문종 원년(1451) 김종서 등이 완성한 〈고려사〉가 있다.

그런데 약 300년의 차이를 두고 편찬된 두 사서에 나타난 궁예를 따라가다 보면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궁예는 더욱 '나쁜 놈'으로 변질돼 간다는 점이다.

전체 50권인 〈삼국사기〉에는 '열전'(列傳)이 있는데 마지막 권이 바로 궁예와견훤을 다루고 있다. 김부식은 왜 궁예와 견훤을 한묶음했을까? 이들을 반역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의 역사기록과는 달리〈삼국사기〉는 '열전'을 따로 세분하지 않았으나 '궁예.견훤열전'은 '반역자 열전'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궁예의 극악무도함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흔히 간통이라는 죄목을 씌워부인 강씨 및 두 아들을 죽인 사건이 꼽힌다.

이 대목을 〈삼국사기〉는 "벌겋게 달군 무쇠방망이로 부인 강씨를 음부를 쳐서죽이고 두 아들까지 살해했다"하고 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똑같은 사건이 〈고려사〉로 넘어오면서 쇠망방이가 난데없이3척 쇠방망이로 둔갑하고, 이것으로 불에 달궈 죽였다 하는 대목에는 "입과 코에서연기가 났다"라는 구절이 추가되고 있다.

궁예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나쁜 인간이 돼 갔다는 증거다. 비슷한 사례는 쿠데타로 쫓겨난 궁예가 강원도 산속으로 달아났다가 백성들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에서도 발견된다.

즉 〈삼국사기〉가 "왕(궁예)이 (쿠데타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미복(평상복) 차림으로 달아나 산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부양(斧壤) 지역 백성들에게 죽었다"고 하는 데 반해 〈고려사〉 기록은 다음과 같다.

"(달아난 궁예는) 이틀 밤을 지내고 몹시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었는데 얼마 안 있어 부양 지역 백성들에게 죽었다" 〈삼국사기〉에는 없는 보리이삭 운운하는 대목이 끼어들어가 궁예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이 두 기록 사이의 이런 차이를 〈고려사〉 편찬자들이 〈삼국사기〉가 빠뜨린대목을 보충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으나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결론은 하나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궁예는 더욱 '나쁜 놈'이 되어 간 것이다.

역사고증에 얼마나 철저했는지는 제쳐두고라도 궁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는 KBS 대하드라마 '태조왕건' 제작진이 궁예의 최후를 자살로 처리하기로했다는데, 기록이 덧씌운 궁예의 억울함을 어느 정도나마 벗겨줄 지 모르겠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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