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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기 국채 환영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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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환영합니다. 다음달이면 당신을 만나는군요. 당신의 이름은 30년 만기 국채. 그러니까 30년 후에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주는 증표죠. 한국이 재정·금융 부문에서 선진국 대열에 들었다는 증표이기도 합니다. 30년 이상 되는 초장기 국채를 발행하는 나라는 대부분 선진국이니 말입니다. 선진국이라 해도 나라 곳간이 거덜나면 초장기 국채 발행은 못합니다. 스페인·그리스는 10년짜리 국채를 발행하면서도 안 팔릴까 봐 가슴을 졸이지 않습니까.

 돌이켜보면 그동안 당신 같은 국채는 국민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첫 국채인 ‘건국 국채’는 돈 없는 정부가 가난한 백성에게 손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1950년 건국 국채를 발행하면서 내건 표어는 ‘한 장의 국채, 호국의 탄환’이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당신의 대선배 중엔 ‘징발보상증권’도 있지요. 정부가 전쟁 통에 징발해 간 토지를 보상할 길이 없자 채권을 준 것입니다. 땅 내놓은 사람은 미치고 팔짝 뛸 일이지만 옹색한 나라 살림에선 궁여지책이었죠. 70년 첫 발행된 이 국채는 올해 초 징발보상증권규칙 폐지로 법률에도 존재하지 않는 과거가 됐습니다. 이런 역사가 있는데 30년 만기 국채라니요, 자랑스럽습니다. 한국 국채를 외면해 온 스위스 같은 나라의 중앙은행이 한국 국채에 투자한다는 얘기가 들려오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당신의 등장은 한국 경제사에 의미 있는 한 줄이지만, 그 그림자도 외면할 순 없습니다. 세계 경제가 침체한 마당에 한국 정부가 호기롭게 당신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수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금융사와 국민연금 등은 고령화를 감안해 장기적으로 안정적 이자를 챙길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합니다. 채권의 만기가 길어지면 떼일 위험도 커지기 때문에 금리가 높은 게 일반적입니다. 바꿔 말하면 시장은 앞으로 저금리 시대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초장기 국채를 반기는 것입니다. 저금리 시대의 다른 이름은 저성장입니다. 기업 가치(주가)가 팍팍 오르고 경제가 쑥쑥 크는 성장 시대는 저물고 있다는 얘기지요. 혹 여윳돈 굴릴 일이 있으시다면 이를 가벼이 여겨선 안 될 것입니다. 이익과 관련된 시장의 판단은 냉정한 법이니까요.

 당신을 내놓는 건 우리가 대외적으로 30년짜리 약속을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속으로 켕기는 구석도 있습니다. 임기 말 대통령의 독도행, 후련하지만 이게 30년을 바라보는 외교인지는 헛갈립니다. 한·일 재무장관 회담은 연기됐고, 양국 간 통화교환(스와프)협정은 삐걱거립니다. 저성장·저금리 시대를 준비하는 시장의 냉정 같은 건 찾기 어렵습니다. 새 권력을 노리는 이들도 과거 얘기만 합니다. 30년은 고사하고 10년 앞 청사진도 내놓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왕 발행하기로 한 것, 우리의 저력을 믿는 외국인 투자자가 당신을 반겨주길 기원합니다.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