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는 “꼴찌라도 즐겁다” 국민은 “당신 덕에 즐겁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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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을 보는 법이 바뀌고 있다.

 금메달을 못 따면 고개를 숙였던 선수들에게 “당당하게 고개를 들라” “덕분에 즐거웠다”는 응원이 쏟아진다. 4년간 최선을 다해 올림픽을 준비한 선수에게 보내는 박수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대한민국 스포츠는 이제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 아니다.

 런던 올림픽 개막 첫날인 지난달 29일(한국시간) 박태환(23·SK텔레콤)이 수영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그는 “밤새 응원해주신 국민들께 죄송하다”고 했다. 누리꾼들이 들고 일어났다.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말라”는 인터넷 댓글이 봇물을 이뤘다. “여름엔 역시 은메달이지. 금메달은 더워 보여”라는 재치 있는 응원 문구도 나왔다.

 9일 태권도 남자 58㎏급 결승전에 나선 이대훈(20·용인대)은 호엘 곤살레스 보니야(스페인)에게 8-17로 졌다. “태권도는 금메달 아니면 욕을 먹는다”는 부담을 안고 있던 태권도 관계자들은 긴장했다.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 이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는 대회 전에 코뼈가 부러졌던 이대훈이 결승전 도중 코를 정통으로 맞아 코피를 흘리며 싸운 것을 보고 감동했다는 내용의 응원 메시지가 넘쳐났다. 이대훈은 한성중학교 2학년 때 ‘내가 죽고 난 뒤 묘비에 어떤 글이 새겨질지 적어보세요’란 숙제를 한 적이 있다. 그는 “태권도 국가대표로 2012년과 2016년, 2020년 올림픽 3연패를 달성하고 99세에 눈을 감았다”고 적었다. 이대훈은 자신이 그린 묘비명 그림을 자주 꺼내보며 꿈을 키웠다.

 30대 노장들로 구성된 남자 탁구팀의 작은 기적도 화제였다. 오상은(35·KDB대우증권), 주세혁(32)·유승민(30·이상 삼성생명)의 평균 나이는 32세. 이들은 세계 최강 중국을 상대로 끈질긴 플레이를 한 끝에 은메달을 땄다. 맏형 오상은은 지난해 말 소속팀에서 갑자기 쫓겨나 한동안 무적 신세였고, 주세혁은 베체트병(만성염증성 혈관질환)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통증을 참아내야 했다. 유승민은 대회 전 오른쪽 어깨 인대가 찢어졌다.

 ‘위대한 도전’을 한 선수들도 영웅이다. 사이클 조호성(38·서울시청)은 돈 잘 버는 ‘경륜 황제’의 자리를 포기하고 아마추어의 고통스러운 길로 되돌아왔다. 그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포인트레이스에서 4위에 오른 뒤 2002년 경륜 선수로 전향했다. 하지만 올림픽 메달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해 2008년 아마추어로 복귀했다. 극한의 훈련을 견뎌내며 런던 올림픽을 준비했지만 사이클 옴니엄 11위로 대회를 마쳤다. “최선을 다해 도전한 만큼 후회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의 박현선(24)-현하(23·이상 K-water) 자매는 꼴찌(결선 12위)를 했다. 그러나 이들은 “금메달 딴 것보다 더 값지다. 즐겁게 연기를 펼쳤다”고 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대표로 활동했던 이들은 변변한 훈련장이 없어 동호인들과 섞여 훈련하면서도 올림픽 결선 무대에 올랐다.

 트라이애슬론에 나선 허민호(22·서울시청)는 55명 중 54등을 했다. 실격 선수 한 명을 제외하면 사실상 꼴찌지만 그는 한국 트라이애슬론 최초로 올림픽 무대를 밟은 선구자다. 수영 여자 평영 200m에 나선 백수연(21·강원도청)은 부정맥과 싸우면서 준결승에 올랐다. 그는 준결승에서 개인 최고기록을 냈지만 8명이 겨루는 결승에 가기에는 0.21초가 모자랐다. 백수연은 지난 4월 대표 선발전 직후 부정맥 진단을 받았지만 올림픽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자 20㎞ 경보에 나선 김현섭(27·삼성전자)은 동메달 후보로 분류됐으나 1시간21분36초로 17위를 했다. 자신이 세운 한국기록(1시간19분31초)에 한참 못 미쳤다. 하지만 김현섭은 대회 전 외할머니 사망 소식을 접한 뒤에도 꿋꿋이 훈련하며 준비했다.

이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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