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한·일 축구사 시작된 그 경기는 바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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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정남식(가운데)이 일본 선수들 사이로 슛 하고 있다. 최정민(왼쪽)과 우상권도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1954년 일본 메이지 신궁에서 열린 한·일 축구 첫 맞대결. 한국이 5-1로 이겼다. [사진 스포츠 자료 수집가 이재형씨]

역사의 굴레가 그라운드의 공기까지 무겁게 했다. 정남식(1917~2005)이 일본 골키퍼와 수비수 틈으로, 안간힘을 쓰며 발을 내밀어 골을 터뜨리고 있다(큰 사진). 1954년 3월 7일 일본 도쿄 메이지신궁 경기장. 전날 내린 진눈깨비로 그라운드는 엉망이었다. 진흙탕 경기장에서 영욕의 한·일 축구사가 시작됐다.

 58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과 일본 축구는 ‘탈아시아’를 목표로 세웠고, 그 꿈에 다가간 지점에서 다시 만났다. 2012년 8월 11일(한국시간) 영국 카디프 밀레니엄스타디움에서 런던 올림픽 동메달을 놓고 겨룬다. 한국은 8강에서 축구종가 영국을 꺾었다. ‘축구가 종교’인 브라질에 패해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일본은 조별리그에서 세계 최강 스페인을 꺾은 여세를 몰아 4강까지 올랐다. 멕시코에 발목이 잡혀 3-4위전으로 밀렸다.

 60년 가까운 세월, 한·일 축구는 치열하게 싸웠다. 영광과 좌절이 교차했다. 서로를 넘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나란히 아시아를 넘어섰다. 한국과 일본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놓고 만날 정도로 강해졌다.

① 첫 한·일전에 나선 한국 대표 선수들의 서약서. 현해탄에 빠져 죽을 각오로 뛰겠다는 결의가 담겼다. ② 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 일본전을 앞두고 제작 된 팸플릿. 재일동포들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③ 86년 멕시코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만난 한국의 김정남 감독(왼쪽)과 일본의 모리 감독.

 ◆올림픽 메달은 일본이 먼저=1954년 스위스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한국과 일본 축구가 첫 대결을 펼쳤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일본 선수를 한국 땅에 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의 예선전이 일본에서의 두 경기로 바뀌었다. “일본에 진다면 현해탄(대한해협)에 빠져 죽겠다!” 한국 선수들은 대통령 앞에서 필사즉생(必死則生)을 서약했다. 한국은 3월 7일 첫 한·일전에서 5-1로 승리한 뒤 14일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거두며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하지만 국제무대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낸 건 일본이었다. 일본은 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며 앞서갔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에는 한국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한국은 86년 멕시코 월드컵 최종예선 1, 2차전에서 일본을 연파하고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한국은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일본을 15승6무5패로 압도했다. 일본은 한·일전을 통해 얻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 바람에 한·일 정기전이 없어졌다. 한·일전 승전보의 백미는 97년 9월 28일 도쿄대첩. 한국은 98 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0-1로 뒤지다 서정원과 이민성의 골로 대역전극을 만들어냈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함께 가자’=“Let’s go to France together(프랑스로 함께 가자)”. 97년 11월 1일 서울 잠실주경기장. 한국 축구대표팀 서포터스 붉은악마는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경기에 현수막을 내걸었다. 한국은 월드컵 본선행을 일찌감치 확정했지만 일본은 반드시 한국을 이겨야 본선행 희망을 이어갈 수 있었다. 붉은악마는 일본을 ‘세계 축구 변방에서 중심으로 함께 나가는 동반자’로 정의했다. 한·일 축구 영웅 홍명보와 나카타 히데토시는 국경을 뛰어넘는 우정을 담은 『홍명보 나카타 TOGETHER』란 책을 냈다. 한국과 일본 축구가 상호보완 관계로 바뀐 터닝포인트였다.

  한국과 일본 축구는 서로를 진정한 라이벌로 인정했다. 기량을 견주고 발전을 도모하는 파트너로 삼았다. 일본은 83년 시작한 한국프로축구를 10년간 연구한 뒤 93년 J-리그를 출범했다. 그리고 월드컵 우승을 목표로 100년 구상을 내놓았다. J-리그 초창기 황선홍·홍명보 등 한국 스타 플레이어를 영입했고, 최근에는 김보경·김영권 등 유망주들을 데려가고 있다.

 일본은 정교한 패스 플레이를 앞세워 2000, 2004, 2011년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한국을 앞질렀다. 한국도 일본 시스템을 연구해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한국은 2002년 월드컵 4강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 일본도 남아공 월드컵 16강을 달성하며 차근차근 성장했다. 신문선(54) 명지대 교수는 “한국 축구는 라이벌 일본이 있어 발전할 수 있었다. 이기고 지고를 되풀이하며 결점을 보완해 나갔다. 덕분에 올림픽 남자축구 4강에 아시아 두 개 국가가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다”고 평했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올림픽 3-4위전이 아닌 월드컵 결승에서 자웅을 겨룰 그날을 위해 한국과 일본은 더 치열하게 싸울 것이다.

하남직·박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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