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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 준비생, 무협게임 하다 인생역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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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모바일 게임업체 이노스파크의 신재찬(37) 대표는 ‘재미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의 세계관은 현대 미술에서 왔다”며 “추상 미술이나 비언어 공연같이 인종과 언어를 뛰어넘는 코드를 모바일 게임에 담고 싶다”고 말했다. [김도훈 기자]

하루 종일 법전과 판례를 들여다보던 뿔테 안경 96학번 대학생에게 ‘현대미술’ 교양 강의는 작은 쉼터였다. 그중에서도 루마니아의 조각가 브랑쿠시의 ‘새’ 연작에 매료됐다. ‘새’라지만 날개도, 부리도 없이 그저 하늘로 길게 뻗은 유선형의 추상 조각일 뿐이다. 그는 여기서 창공을 향한 갈망을 느꼈고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보편적인 열망, 거기서 무언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10여 년 뒤 이 청년은 하늘 위의 성에서 펼쳐지는 소셜게임 ‘룰더스카이’를 만든다. 스마트폰 속 세상에서 천공에 자기만의 성을 짓고 친구와 교류하는 이 게임은 출시 1년 만에 이용자가 450만 명을 넘었다. 매일 75만 명이 넘게 게임에 접속해 모바일 소셜게임으로는 최초로 월 매출 40억원을 돌파했다.

 이 게임 개발을 총괄했던 신재찬(37) 이노스파크 대표를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브랑쿠시 조각의 추상성과 김기덕 감독 영화 ‘섬’의 사회학적 의미를 게임에 담았다는 그는 “게임을 잘 못하는 게 내 경쟁력”이라고 역설했다. “초보자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재미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세대에서 법학과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 입학 후 3년간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신 대표의 형 둘을 의사로 키운 공무원 아버지가 막내는 법조인이 되기를 바랐다.

 인생 행로는 우연히 바뀌었다. 신 대표는 당시 ‘영웅문’이라는 무협 온라인 게임을 즐겨 했는데, 그 게임을 만든 회사가 그가 살던 서울 방배동 집 바로 앞에 있었다. 게임을 하는 중 궁금증이 생겨 물어보려고 잠깐 회사를 방문했고, 게임 속 캐릭터의 관계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개발팀장으로부터 ‘신작 기획을 함께해 보자’는 권유를 받았다. 정보처리 산업기사 자격증 소지자인 그는 그 인연으로 이 회사에서 병역특례로 3년간 근무하며 ‘신영웅문’ 개발에 동참했다. 졸업 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게임계에 투신해 엔씨소프트와 와이브로 전용 게임 단말기 업체 포스브로를 거쳐 2009년 JCE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모바일 팀장으로 만든 ‘룰더스카이’가 대박을 터뜨렸다.

룰더스카이 게임 화면.

 신 대표는 “게임이 더 화려한 그래픽, 더 좋은 서버로 경쟁하는 시대는 끝났다”며 “게임에도 가랑비에 옷 젖는 ‘롱테일의 법칙’이 적용될 것”이라고 했다. 모바일 시대에는 ‘게임을 해야지’ 마음먹고 시간을 내 PC 앞에 앉는 이보다, 5~6분 짬 날 때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 가벼운 게임을 즐기는 이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인류 공통의 심리를 연구하려고 한 달에 2~3권씩 인문 도서를 읽는다. “‘태양의 서커스’ 같은 비언어 공연에 전 세계인이 공감하듯 게임도 보편적인 재미를 담아야 매니어층을 넘어 많은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신념이다. 룰더스카이에 있는 독특한 기능인 ‘친구 물건 훔쳐가기’나 ‘도와주기’ 역시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긍정·부정적인 교류를 모두 반영한 것이어서 인기를 끌었다. 지난 2월 국내 최대 게임업체 넥슨이 JCE를 인수했고 그 후 신 대표는 4월에 회사를 나와 이노스파크를 창업했다. 룰더스카이의 개발·기획팀 10여 명도 그와 함께했다. 이노스파크는 지난 6월 NHN한게임과 신작 게임 서비스 계약을 했다. 설립한 지 두 달이 채 안 된 회사가 아직 만들지도 않은 게임을 계약부터 한 것이다. NHN 측은 “신재찬 사단의 경험과 기획력을 믿고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5000만 내려받기를 돌파한 NHN의 모바일 메신저 ‘라인’에 이노스파크의 모바일게임을 연동해 서비스하는 것도 논의하고 있다.

 “당신이 주고 싶은 재미의 본질은 뭐죠?” 신 대표가 이날도 열댓 명의 직원에게 잊지 않고 던졌다는 ‘이노스파크’의 구호다.

심서현 기자

소셜네트워크게임(SNG) 기존에 맺은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친구나 지인과 함께 즐기는 게임. 게임 자체를 즐기도록 한다기보다 서로 간의 친밀감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성별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즐길 수 있도록 쉽고 단순한 것이 특징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 내에서 친구끼리 즐길 수 있는 ‘팜빌’ ‘시티빌’ 같은 게임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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