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에 선 지방병원, 국가 의료시스템 위협한다'(1)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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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서구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H(55) 원장은 작년 말 17년째 운영하던 병원을 정리했다. 경영악화로 더 이상 병원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95년 작은 동네 병원 내과에서부터 시작한 H원장은 성실하게 병원을 운영한 덕에 준종합병원으로까지 몸집을 불렸다. 갑상선암 같은 간단한 수술도 했다. 하지만 지난 7~8년 전부터 경영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수술 환자는 점점 줄고 검진환자는 서울에서 내려온 프랜차이즈 전문병원에 뺏겼다. 게다가 의사도 구하기 어려웠다. 수소문해서 좋은 의사를 뽑아 놓으면 내시경 검사법만 배워 서울 유명 병원으로 달아났다. 갑자기 곳곳에 의사의 빈자리가 생기자 환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의사가 부족한 병원’이라는 소문은 빨리 퍼졌고, 연이어 터진 의료사고로 환자는 급감했다. 의사들 월급과 임대료를 주기 위해 빌린 돈이 15억 원 가량 밀리자 회생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현재 H씨는 병원을 정리하고 페이 닥터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무너지는 지역병원…수도권 원정진료비만 한해 2조원

지역병원이 무너지고 있다. 수도권 의료기관에서 진료받은 지방 환자는 2008년 222만 명에서 2010년 240만 명으로 늘었다. 수도권 원정 진료로 나간 건강보험 진료비 또한 2008년 1조6921억원에서 2010년 2조1052억으로 크게 증가했다.

원정진료로 가장 많은 의료비를 쓴 곳은 충남지역이었다. 이 지역 환자 40만111명은 2010년 한해 2545억원의 진료비를 수도권 진료에 지출했다. 강원·경북·충북이 그 뒤를 이었다.

작년 11월 보건의료산업학회지에 발표된 내용도 비슷했다. 2008년 한 해 서울지역 종합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총 33만 437명이었는데 80%에 해당하는 나머지 26만2818명이 타지역 환자들이었다.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 김성수 기획홍보팀장은 “지방 병원은 점점 죽어가고, 수도권 병원들은 점점 거대해지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KTX 개통 뒤 지방 환자 서울로~
2017년엔 목포-서울도 2시간 이내

지역병원의 몰락을 가져온 이유로 많은 전문가들이 2004년 KTX 개통을 꼽는다. 중소병원협회 최희윤 국장은 “지방 환자의 지역의료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게 본격적으로 표출된 건 KTX가 개통되면서부터였다”고 말했다.

전남화순대병원 서상우 홍보팀장은 “과거엔 아무리 서울지역으로 치료받으러 가고 싶어도 반나절 이상 걸리기 때문에 포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KTX가 개통된 후 그야말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됐다. KTX 개통 라인에 있는 대구·대전·부산은 직격탄을 맞았고, 곧 개통될 호남고속철로 2014년엔 광주, 2017년엔 목포까지 1시간45분대로 서울로 진입하게 돼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서 팀장은 “전남화순대병원이 지방병원 중에서는 선전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동안 KTX의 ‘빨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곧 닥칠 서울-광주간 고속철 개통을 대비해 모든 역량을 동원해 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중소병원협회 백성길 회장은 “이제 지방에서는 암·심장·뇌 등 큰 수술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수술이 없으니 밑에 훈련 받는 레지던트나 전문의도 당연히 없어지게 됐다. 중증 수술의 맥이 끊기는 거다. 이러다 지역 의료 인프라는 완전히 붕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북의 모 대학병원 교수는 “우리 병원엔 몇 년째 흉부외과·응급의학과 지원자를 받지 못했다. 과 자체가 3D라 불릴 만큼 수련받기 힘든데다 지방병원에서는 수술 경험을 많이 쌓지 못해 지원자가 줄고 있다”며 “지금은 지역주민이 이렇게 외면하지만, 나중엔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등으로 응급수술이 필요할 때도 서울로 간다고 할 것인가.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간호등급제 시행 뒤 지방 중소병원은 이중고

두 번째로 지적하는 게 간호등급제다. 한국병원경영연구원 이용균 실장은 “1999년부터 간호등급제가 시행되면서 지역 중소병원이 더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간호등급제란 간호사 1인당 병상수를 기준으로 1~7등까지 급을 매겨 등급이 높으면 가산점을 부과하고, 낮으면 입원료 삭감 등의 벌칙을 적용하는 제도다. 7등급은 간호사 1인당 병상 수가 6개 이상인 병원으로, 전체 환자 입원료 수가의 5%를 삭감 당한다. 대한중소병원협의회 백성길 회장은 “간호사를 구할 수 없는 지방의료원은 안 그래도 낮은 입원료 수가에 5%를 추가로 삭감 당한다. 그 돈은 병상 수 대비 간호사 기준을 맞출 수 있는 서울 대형병원의 인센티브로 돌아간다. 지방병원의 몰락이 예견된 탁상행정이라는 비판이 많았지만 결국 시행됐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전문가들도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있지만 지금은 간호사협회의 반발로 폐지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지방 병원장 능력은 의사·간호사 얼마나 잘 모셔오느냐에 판가름

세 번째는 서울 대형병원의 병상 늘리기와 맞물린 의사·간호사 인력 흡수다. 현재 서울 빅5 병원의 병상 수는 1만여 개. 전국 병원 병상 수의 30%를 차지한다. 병원이 커지니 고용되는 의사 수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 의대를 졸업한 의사는 물론, 지방 출신 의사들도 모두 서울로 향한다.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 김성수 기획홍보팀장은 “지방의 전통 있는 병원이 명맥을 유지하는 첫 번째 조건이 의료 수준이다. 이름 있는 의사를 모셔오고 싶지만 정말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선임된 의료원장의 첫 번째 미션이 ‘능력 있는 의사 모시기’다. 의사를 잘 모셔오고, 계속 근무하도록 묶어두느냐에 따라 의료원장의 경영 평가가 갈린다”고 말했다. 이는 ‘간호사 모시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렇다 보니 의사·간호사의 몸값은 청정부지로 뛰었다. 백성길 회장은 “간호사 등급제 때문에 같은 치료를 해도 지방병원은 수가를 더 낮게 받는다. 환자도 더 적다. 돈은 안 벌리는데 사람 값만 계속 높아진다. 이용균 실장은 “대학병원에서조차 서울에선 1억원 정도 연봉을 주지만 지방에선 3~4억원 준다고 하는 데도 많다. 그런데도 교수 구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간호사도 마찬가지다. 지방일수록 간호사 월급은 더 많아진다. 백성길 원장은 “지방에서는 병원이 간호사를 면접 본다고 하지 않는다. 간호사가 거꾸로 병원을 면접 본다고 할 정도로 인력 수급에 난항을 겪고 있다. 연봉 인상은 물론 사택 제공까지 제안해도 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악순환이 이어진다. 포항세명병원 김필순 홍보팀장은 “인건비는 높아지고 수입은 적어지다보니 경영은 어려워지고, 정작 구입해야 할 치료기기나 장비에 대한 투자가 적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환자가 더 줄고, 경영 악순환이 이어져 결국 파산하게 되는 구조다. 포항에도 이런 수순을 밟아 파산한 병원이 여럿”이라고 말했다.

직원 월급은 서울의 절반…만성적자 허덕이는 지방의료원

작년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의 통계자료를 보면, 지방의료원의 5곳만이 흑자를 냈다. 85%를 차지하는 29개 지방의료원은 평균 13억8천만 원에 달하는 적자를 냈다.

제주의료원은 2003년부터 2010년까지 120억5700만원이 적자다. 강릉의료원은 경영악화로 몇 년째 직원들에게 월급을 50~80%만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2008년부터 직원에게 주지 못한 월급이 현재 30억원이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에 소속된 병원은 지자체에서 절반의 운영비를 지원하는 의료시설이다. 지원비가 없는 민간의료시설은 이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지방 병원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이용균 실장은 “아마도 지방에서 심장·간·뇌 등 주요 장기에 대한 응급질환이 생기면 급히 수술할 병원이 없어 사망하는 사례가 속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부인과 같은 필수 의료기관도 없어 고위험 산모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백성길 회장은 “전 국민이 균등하게 누려야 할 의료 인프라를 지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차별 당하게 될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보건복지부와 지자체가 손을 맞잡고 지방 의료기관에 대한 규제를 풀고, 인센티브를 늘리는 등의 특단의 행정개혁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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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영 기자 jybae@joongang.co.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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