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루한 하루 … 깨진 꿈은 하늘로 날아오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김애란은 등장인물을 사랑하는 작가다. 그는 “소설 속 인물을 보통명사처럼 그리지 않고 고유명사처럼 그리고 싶다. 그러려면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주변 사람들과 포개놓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작품 속에서 그렸던 인물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답은 빨리 나오지 않았다. 최근 작품이 조금 무거워진 듯하다는 질문에 소설가 김애란(32)은 생각을 곱씹은 뒤 느린 말투로 말했다. “개인적으로 어떤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막막한 20대의 삶을 따뜻하게, 때론 능청스럽게 그려내던 발랄함은 자취를 감췄다. 그렇다고 김애란이 달라진 건 아니다. 시선이 넓어졌을 뿐이다.

 본심 진출작인 단편소설 ‘하루의 축’을 비롯, 최근 펴낸 소설집 『비행운』 속 등장인물의 연령대는 다양하다. 생활인의 때가 낀 인물들이 소설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고시원·편의점을 맴돌던 ‘김애란표’ 캐릭터들의 동선도 넓어져 공항으로까지 뻗어나간다. ‘하루의 축’ 주인공인 기옥씨는 인천국제공항 청소원이다.

 “우연히 공항 화장실 휴지통에서 등산화 한 짝을 봤다. 청소원들은 별별 물건을 다 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청소원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더라. 화장실의 일부처럼, 풍경처럼 지나친 거다. 카메라의 시선을 바꿔서 머무는 사람이 떠나는 사람을 바라보는 걸 담고 싶었다.”

 공항은 떠나려는 자의 원심력과 돌아오는 자의 구심력이 뒤엉켜 있는 공간이다. 출발과 도착이란 표지판에 맞춰 모두가 망설임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곳이다. 추석 전날인 오늘, 공항의 그 분주함은 극에 달한다.

 사람들은 떠나고 날아오르지만 기옥씨는 떠날 수 없다. 현실이 너무 무거워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궂은 일을 하며 키운 아들은 절도죄로 감옥에 있다. 아들이 약속하던 해외여행도, 아들이 꿈꾸던 호주 어학연수도 모두 사라진 꿈이다. 깨진 꿈을 하늘로 날아오른 비행기의 자취, 비행운(飛行雲) 너머로 가늠할 뿐이다.

 기옥씨의 삶은 고단하고 일상은 남루하다. 스트레스성 탈모로 휑해진 머리는 처량할 지경이다. 그래도 추석날은 쉬려 하지만 그런 평범함도 기옥씨의 차지는 될 수 없다. 위로를 기대했던 아들의 편지에는 ‘엄마, 사식 좀…’이라는 한마디 말뿐이었다. 기옥씨는 휴일근무를 자청한다.

 궁금했다. 기옥씨가 기다리던 아들의 편지에는 왜 단 한마디 말밖에 없었는지. 김씨는 “허기(虛氣)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수확의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추석의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의 하루를 보여주려 했다. 한가위에 느끼는 배고픔, 그건 먹고 사는 문제이자 정신적 허기다”라고 말했다.

 추석 전날, 구름 한 점 없는 밤 하늘 위로 크고 휘영청 둥근 달이 떴다. 기옥씨의 마음은 스산하다. 그제야 고개를 든 허기에 기옥씨가 젊은 아기 엄마가 버리고 간, 하나에 2000원이 넘는 마카롱을 집어 든다. 둥근 달을, 휑한 기옥씨의 머리를 닮은 노란색 마카롱을 입에 넣는다. ‘왜 이렇게 단가…이렇게 달콤해도 되는 건가….’ 기옥씨는 웅얼거린다.

 “기옥씨가 처음 먹어보는 달콤한 마카롱은 씁쓸한 인생과 대비되는 동시에 돈의 맛을 보여준다. 달기 때문에 허기를 더 자극해 헛헛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긴 하루였다. 달라진 건 없다. 기옥씨의 흰 머리카락은 지구가 자전하는 방향과 같은 쪽을 향해 하수구 속으로 회오리 쳐 나갈 것이다. 하루의 축은 변함없이 똑같이 돈다.

◆김애란=1980년 인천 출생.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젊은 작가상 등 수상.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비행운』,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ADVERTISEMENT
ADVERTISEMENT